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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미담] 한국미술 글로벌 열풍 뒤엔…'보이지 않는 문화외교' 있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 1999년 시작한

KF 한국미술 큐레이터 워크숍

26년간 440여명 전문인력 초청

2016년 美서 첫 '책거리' 전시

궁중화·민화 조선미술 알려

대영박물관·메트로폴리탄 등

해외 주요기관 한국전시관 주도

탄탄한 글로벌 인프라 이끌어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해외 미술 전문가 초청 프로그램 ‘큐레이팅 코리아’에 참가한 큐레이터들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 상설전을 관람하며 토론하고 있다. 사진 제공=한국국제교류재단




국립중앙박물관의 연간 누적 관람객 수가 500만 명을 돌파했다. 전년 대비 70% 늘어난 수준이며 역대 최다 방문객이다. 한국 문화와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이 열풍은 왜,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한국 미술이 주목받는 것은 미술 애호가인 방탄소년단(BTS)의 RM(본명 김남준) 때문이고, 박물관이 북적이는 이유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덕분이다”는 얘기도 상당 부분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지금의 화려함 이면에는 우리가 그간 몰랐던 ‘보이지 않는 손’의 노력이 숨어 있다.

◇한국미술→K아트 키운 문화 외교

2016년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찰스왕센터에서 한국의 전통 회화 중 하나인 책거리(책가도) 병풍의 미국 첫 전시가 막을 올렸다. 캔자스대 스펜서미술관, 클리블랜드미술관으로 순회전이 이어졌다. 궁중화부터 민화까지 아우르는 조선의 미술이 미국 한복판을 누비는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의 미(美)’가 미 대륙을 횡단한 것은 1957년부터 3년간 열린 ‘한국국보전’이 최초였는데 이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난 나라의 문화 저력을 강력한 우방인 미국에 소개하며 문화 외교를 확인시키는 국가 주도의 행사였다. 60년 뒤의 ‘책거리’ 전시는 좀 달랐다. 한국 정부가 아닌 현지 기관의 자체 기획이었다. 이들은 어떻게 한국 미술을 알게 됐을까. 캔자스대에서 동양미술사를 연구하는 마르샤 하우플러와 이 대학 미술관의 크리스 이만츠 얼컴스가 지속적으로 방한해 한국 미술을 경험했다. 여기에 스토니브룩 찰스왕센터의 진진영, 클리블랜드미술관 임수아 큐레이터 같은 한국계 연구자들이 힘을 보태 한국 미술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콘텐츠로서 ‘책거리’ 전시를 발굴해 전시 기획으로 성사시켰다. 이들은 모두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이하 KF)이 매년 개최하는 ‘KF 한국미술 큐레이터 워크숍’을 통해 한국을 방문해 주요 기관을 돌아보고 국내 네트워킹 기회를 제공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2023년 10월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 열린 ‘시간의 형태:1989년 이후 한국미술’에 선보인 서도호 작가의 작품. 사진 제공=필라델피아미술관


이 워크숍은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 한국실과 담당 큐레이터조차 제대로 없던 시절인 1999년에 처음 시작됐다. 해외 기관에서 일할 한국 미술 전문인력 양성을 목표로 했고 나아가 해외 전문가들이 한국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스스로 한국 문화를 연구하게 만드는 ‘문화 외교력 강화’가 목적이었다. 지금까지 누적 참가자는 440명이 넘는다. 2022년 북미 대륙 최초의 한국 근대미술 전시로 미국 LA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열린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도 이 워크숍에 4번이나 참여한 한국계 미국인 큐레이터 버지니아 문의 손에서 탄생했다. 비슷한 시기에 현대 한국화를 독특한 필치로 풀어내는 원로 화가 박대성의 순회전도 열렸는데 이 또한 KF의 큐레이터 워크숍을 통해 작가를 접한 기획자들이 엮어냈다. 이듬해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한국동시대미술’ 전시와 영문 도록 발간은 이 워크숍에 수차례 참여했던 필라델피아미술관의 우현수 아시아미술 디렉터와 엘리자베스 아그로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공짜는 없다. 씨를 뿌리지 않고 거두는 열매도 없다. 한류의 인기로 한국 미술까지 관심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일테지만 그 이면에는 KF가 20년 이상 조용히 뿌린 씨앗이 이제야 서서히 성과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행사 초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과의 협력을 기반으로 한국 전통 미술을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그 성과로 대영박물관, 메트로폴리탄 같은 해외 주요 기관의 한국실이 튼실해졌고 별도 큐레이터 채용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한국 현대미술도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올해부터는 행사명도 ‘큐레이팅 코리아’로 바꿔 걸었다.

KF 큐레이팅 코리아에 초청된 해외 미술 전문가들이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제로 한 우정아 포스텍 교수의 특강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한국국제교류재단


지난달 ‘키아프리즈’ 기간에 KF의 ‘큐레이팅 코리아’를 통해 13명의 해외 전문가들이 방한했다. 리움미술관을 방문해 ‘이불:1998년 이후’를 관람한 이들은 바로 다음 날 경기도 소재 이불 작가 작업실을 방문해 전시에서 품었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미공개 작업 계획까지 들은 큐레이터들은 작가에 대해 한층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2~7월 독일의 국립 함부르거반호프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미디어아티스트 김아영의 개인전을 함께 준비하기도 했던 샬럿 크놉 큐레이터는 ‘작가와의 대화’ 때 김아영을 다시 만나 반가워했다. 그는 “예술가들이 사회적 변동 속에서 어떤 감각적 언어로 새로운 형태의 인간 경험을 제시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며 한국 미술의 다양성에 관심을 표했다. 스튜디오 방문의 마지막 주인공이었던 정연두 작가는 20세기 초 멕시코로 건너가 선인장 농장에서 일한 한인 디아스포라(실향민)의 사연을 소재로 한 작업 ‘백년 여행기’를 상세하게 들려줬다. 작가의 설명을 들으며 작업 관련 자료들을 살펴본 로버트 슬리프킨 뉴욕대 IFA 미술사학과 교수는 “나는 예술이 역사적 기억과 사회적 정체성을 어떻게 시각화하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서 “한국 미술은 내 연구의 맥락에서 근대성과 탈식민주의, 그리고 세계 미술사 속 아시아 담론을 확장하는 중요한 연결점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지 기관의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한국 콘텐츠를 기획하도록 유도하고, 나아가 한국 미술의 ‘지속 가능한 수출형 전시 모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KF 큐레이팅 코리아 초청으로 방한한 해외 미술 전문가들이 지난 9월 9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을 관람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한국국제교류재단




◇탄탄한 인프라에 ‘주체적 다양성’ 필요

요즘은 ‘K컬처’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 ‘한류’의 촉발 지점은 K드라마·K팝 등의 대중문화였지만 이어 K클래식·K문학·K시네마, 심지어 K민주주의까지 국제적으로 회자되면서 그 문화적 토양으로서 K헤리티지(문화유산)와 K아트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추세다. 대중문화를 위시한 한류 확산에서는 단연 민간의 활약이 지대했지만 순수 예술 분야에서는 이처럼 정책적 지원의 ‘보이지 않는 손’이 든든한 뒷배가 됐다. 여기에 메트로폴리탄 한국실, 구겐하임 큐레이터십 등을 지원한 삼성전자, 테이트모던 전시와 메트로폴리탄의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을 후원하는 현대자동차, 뉴욕근현대미술관(MoMA)과 스폰서십을 유지하는 현대카드, LG구겐하임 어워드를 제정한 LG 등 국내 기업들의 글로벌 활동이 큰 힘이 돼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중이다.

매년 9월 한국 미술계가 국내외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프리즈서울(Frieze Seoul)과 키아프 서울(Kiaf Seoul)의 ‘키아프리즈’ 효과는 이 같은 민관의 문화예술 인프라가 구축돼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재명 정부가 내건 ‘K컬처 300조 원 시대’에 대한 공약도 겹겹이 깔린 인프라를 염두에 뒀기에 가능한 제안이다.

지난 10월 3~5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지엑스포에서 열린 동남아 대표 아트페어 '아트 자카르타'의 행사 전경. 자카르타(인도네시아)=조상인기자


이 화려함의 정점에서 우리가 내디딜 큰 걸음의 방향이 중요하다. 최근 다녀온 인도네시아의 아트페어 ‘아트 자카르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젊은 컬렉터 톰 탄디오(45)는 자동차 부품 관련 사업이라는 본업이 있지만 2018년 아트페어를 인수해 ‘아트 자카르타’의 페어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컬렉터 친구들’과 함께 “문화적 미래에 대한 공동 책임”을 강조하며 아트 자카르타를 “아시아 미술 중심의 아트페어”로 키워가는 중이다. 인도네시아와 아시아 미술 고유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강조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 숱하게 다녀본 기존의 아트페어와 전혀 다른 작품들을 경험하게 한 아트 자카르타는 다름의 미덕, 다시 찾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근간에 깔린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 그것이 경쟁력이다. 국내 주요 아트페어들이 서구 지향의 잣대로 ‘고급’ 페어, ‘고가’ 작품, ‘대형’ 갤러리만 맹신한다면 한국의 아트페어가 아트바젤과 프리즈 같은 플랫폼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지난 10월 3~5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지엑스포에서 열린 동남아 대표 아트페어 '아트 자카르타'의 행사 전경. 자카르타(인도네시아)=조상인기자


아트 자카르타에서는 올해 ‘코리아 포커스’를 마련해 한국의 갤러리 12곳이 참가했다. 갤러리2와 갤러리소소 같은 20여 년 경력의 갤러리도 있었지만 절반가량은 이번이 첫 해외 아트페어 참가였다. 현지 관객들은 색다른 한국의 ‘젊은 미술’에 관심을 가졌고 몇몇 갤러리는 ‘솔드아웃’까지 거둘 정도로 호평받았다. K아트는 지금 정점에서 전환을 모색할 때다. ‘세계 속 한국 미술’에서 ‘한국을 통해 확장되는 세계 미술’이 전개되는 중이다. 정부 지원의 기반 위에 주체성, 다양성, 자부심의 ‘날개’를 단다면 K아트도 세계가 배울 모델이 될 수 있다.

지난 10월 3~5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지엑스포에서 열린 동남아 대표 아트페어 '아트 자카르타'의 행사 전경. 자카르타(인도네시아)=조상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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