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0일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소식을 접한 후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대미 수출 자동차 관세는 15%로 인하되고 반도체와 의약품 등에서도 최혜국 대우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8월 25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문 발표와 관세 협상 서명이 불발됐다. 미국과의 서명에 성공한 일본에는 대미 수출 자동차 관세가 이달 16일부터 15%로 인하됐지만 한국은 여전히 25%의 자동차 관세를 물고 있다. 현재는 현대차·기아가 미국 시장 점유율 유지를 위해 가격 인상을 늦추고 있으나 높아진 관세 때문에 언제까지 가격 인상 없이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한미 간 관세 협상 서명이 지연되는 배경에는 3500억 달러에 달하는 대미 투자 기금에 대한 양국의 시각차가 있다. 당초 한국은 3500억 달러 대부분이 보증과 대출 성격으로 현금은 극히 적다고 발표했지만 최근 미국은 3500억 달러 투자는 현금 출자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이 일본과 합의한 조건(대미 투자금을 회수할 때까지는 미국과 일본이 5대5로 분배하고 투자금 회수 이후에는 9대1로 미국이 수익의 대부분을 갖는 조건)을 한국에도 적용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투자 자금의 성격, 투자 대상 선정, 수익 분배에서 일방적인 미국 측 주장을 한국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현재의 환율을 고려하면 3500억 달러는 약 488조 원으로 한국 한 해 예산의 70%를 웃도는 금액이고 4113억 달러 수준인 외환보유액의 85%에 달하는 금액이다. 미국과의 의견 차이를 떠나서 이렇게 큰 금액을 정부 재정에 부담을 지우지 않고 외환시장에 큰 충격 없이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 3500억 달러에 합의했는지 모르겠지만 정부는 협상을 진행함에 있어서 대규모 대미 투자가 가져올 득실을 정확하게 따져야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딘 베이커는 상호관세가 25%에서 15%로 하락할 때 한국의 대미 수출 증가액은 125억 달러에 불과하다며 125억 달러를 얻기 위해 3500억 달러를 투자할 필요가 있는지 지적했다. 베이커가 추정한 125억 달러가 몇 년치 수출 증가액인지, 그리고 수출 변동액을 어떤 방식으로 추정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거액의 대미 투자가 가져다 줄 수출 증가의 효과를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은 귀 기울일 점이 있다.
또 대미 투자가 급증한 최근 10년 동안 국내 공장 폐쇄율이 설립률보다 높았다는 점에서 3500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미국 투자는 한국 제조업 공동화와 고용 감소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불확실성이 높아진 미국 시장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 내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내걸었던 보조금은 이미 축소됐고 이민 단속은 강화되는 등 약속이 순식간에 뒤집히는 미국 시장이 과연 거액의 장기적인 투자가 가능한 환경인지, 차라리 높은 관세를 물고 수출하는 것이 나은지 잘 비교해봐야 한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가 유발할 경제적 득실을 바탕으로 미국을 설득함과 동시에 먼저 협상을 타결한 일본과 한국의 차이도 잘 전달해야 한다. 일본의 5500억 달러 대미 투자는 국내총생산(GDP)의 9.3%에 불과하지만 한국의 3500억 달러는 GDP의 17.5%에 달한다. 일본과 한국은 경제 규모에서 차이가 있고 일본은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상태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대규모 미국 투자는 한국 외환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잘 설명해야 할 것이다.
쌀과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추가 개방은 없다고 단언하면서 한국 정부는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 서명하는 바람에 대미 협상에서 정부는 더욱 압박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대미 무역액, 노동자 수준과 인건비 차이, 미국 시장 불확실성 등을 고려한 경제적 분석을 바탕으로 일본과의 차이점, 그리고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와 달리 경제 협상은 한미 양측이 모두 이익을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정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협상을 통해 한국 경제에 미칠 부작용을 줄이고 상호 합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안전 장치를 최대한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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