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기념 열병식을 계기로 다자외교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경제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번 열병식을 통해 중국 주도 ‘반미 연대’의 한 축으로 존재감을 과시한 김 위원장이 러시아 편중 외교에서 벗어나 대중 관계 복원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4일 관영 중국중앙TV(CCTV)와 신화통신 등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이날 오후 시 주석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 위원장과 시 주석 간 회담은 2019년 1월 김 위원장의 방중, 그해 6월 시 주석의 방북으로 이뤄진 두 번의 정상회담 이후 6년여 만이다. 관심을 모았던 북중러 3국 정상회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날 귀국하면서 무산됐다.
북한과 중국은 이번 회담에서 장기간 서방 제재로 타격을 입고 있는 북한 경제 활성화 방안 등을 집중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중국과 북한은 국제 및 지역 문제에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공동 이익을 수호해야 한다”며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국은 항상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며, 북한과의 조율을 계속 강화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최대한 유지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각 영역에서 실무 협력을 전개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김 위원장도 “양국의 상호 이익과 경제 무역 협력을 심화해 더 많은 성과를 거두기를 바란다”며 “북한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공정한 입장을 높이 평가하며, 유엔 등 다자 플랫폼에서 계속해서 조정을 강화하고 양측의 공동 및 근본 이익을 잘 보호하기를 원한다”고 화답했다. 특히 "(중국) 당의 건설과 경제발전 등의 경험을 교류해 (북한)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적극적인 교류 의지를 나타냈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이번 중국 방문에 김덕훈 당 경제부장, 김용수 당 재정경리부장 등 경제 관료들을 대동했다. 이를 두고 김 위원장이 시 주석과의 만남에서 경제협력 채널 복원을 시도하기 위해 경제 참모를 대거 대동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러시아에 치중하며 밀렸던 대중 관계를 회복하는 시작점을 경제 파트로 삼은 셈이다. 현재 북한은 안보는 러시아와, 경제는 중국과 협력하는 ‘안러경중’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북한과 러시아는 지난해 상호방위조약을 맺었고 전날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우크라이나 전장에 추가로 북한군 6000여 명을 파병하는 방안 등을 논의했다. 북한은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국과의 경제 ‘밀착’에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들어 북중 간 무역은 활발해지는 추세다. 중국 세관총서에 따르면 올해 1~7월 북중 무역 총액은 14억 6584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2% 증가했다. 수교 75주년을 맞은 지난해의 경우 12개월 중 11개월간 전년 동월 대비 감소세를 보이며 양국 관계 냉각을 반영했다. 올해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1월부터 7개월 연속 증가세를 나타냈다.
양국 국경 지대에서 교역 확대를 위한 인프라 구축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성 단둥 지역 신압록강대교 북한 쪽 교각 부근에서 최근 세관 관련 건물 건설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 다리는 양국 합의로 2014년 완공됐지만 미개통 상태였다. 중국 쪽에서 관찰한 결과 6월 초 저층부만 보였던 건물이 8월 말 시점에는 지상 9층까지 주요 구조가 완성됐다. 닛케이는 세관 시설 정비로 새 다리의 개통도 가까워졌다고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 경제에서 중국의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통일부에 따르면 최근 10년 동안 북한의 대외 교역에서 중국의 평균 비중은 93.9%에 달한다. 2023년에는 98.3%로 거의 100%에 육박했다. 특히 북한 장마당(시장)에서 1년 새 쌀값이 2배 이상 치솟는 등 민생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중국의 경제적 지원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북한이 다음 달 10일 노동당 창건 80주년 기념행사와 내년 노동당 9차 대회 등 대규모 행사를 앞두고 있는 점도 중국의 경제적 원조가 절실한 이유로 꼽힌다. BBC는 북한이 올해 개장한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에 대규모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라도 중국 공산당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짚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날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이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개최한 ‘NK 포럼: 이재명 정부 출범 100일 대북정책 과제와 전망’에서 “북한은 지금 경제 사정이 형편없는데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돈으로는 해결이 어려워 경제부장을 데리고 중국을 찾은 것”이라며 “북중 경제협력이 가장 중요한 의제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시 주석 역시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를 위반하지 않는 수준에서 북한을 적극 지원하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승절 80주년 행사에서 볼 수 있듯 반미 전선에서 북한의 존재감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더구나 중국 입장에서 북한은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카드다. 김 위원장 입장에서도 시 주석과의 ‘밀착’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대비한 포석이다. 또 다음 달 말부터 11월 초까지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시 주석이 참석하면서 중국이 한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 위원장이 국제 정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남북 대화에도 응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기동 INSS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은 비핵화 협상을 동반한 대미 관계 개선보다는 러시아·중국·이란 등 수정주의 세력 진영과의 연대를 전략적으로 선택했다”고 분석하면서도 “다만 필요할 경우 가장 적대적인 국가인 남한과도 대승적 차원에서 ‘통 큰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한편 이날 회담이 끝난 뒤 시 주석은 김 위원장과 소규모 차담을 갖고 연회를 열었다. 김 위원장은 이후 베이징역으로 이동, 전용열차를 타고 2박3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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