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마지막 홀에 두 번째 샷을 하고 박혜준(22·두산건설)은 TV 중계 카메라를 향해 빙긋 웃었다. 추격해온 선수들과 넉넉하던 격차가 확 좁혀져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는 웃었다. “속으로는 초조했는데 방송에 나가는 거라고 하기에 웃었죠, 뭐.”
올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의 ‘뉴 스타’ 박혜준은 웃는 얼굴이 보기 좋다는 말을 인사만큼이나 흔히 듣는다. “아빠를 닮아 원래 생긴 게 ‘웃상’”이라는 설명. 잘 돼도, 안 돼도, 떨려도 웃는다. “어릴 때 저는 그냥 쳐다보는 건데 ‘왜 웃어?’ ‘나 좋아?’라는 반응이 많았죠. ‘우습냐?’라고 기분 나빠하는 친구도 있었고요.”
박혜준의 웃는 얼굴은 서울 강남 복판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소속사인 두산건설이 논현동 본사 건물에 초대형 우승 축하 현수막을 걸어 놓았기 때문이다. 가로 21m, 세로 25m나 돼 14~19층 6개 층을 덮고 있다. 2021년 두산그룹에서 계열 분리되기 이전에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의 우승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내건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두산건설 골프단장인 오세욱 상무는 “골프단 창단 3년 차에 우승 선수가 처음 나와 특별하게 기념하고자 했다. 올 초 영입한 박 선수는 2022년 데뷔 전부터 눈여겨봤던 좋은 선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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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매니지먼트사 사무실에서 만난 박혜준은 “첫 우승하면 새 차를 사겠다고 했었는데 막상 우승을 하니 부모님이 허락을 안 해주신다”며 웃었다. 그는 이달 베어즈베스트 청라에서 끝난 롯데 오픈에서 노승희, 이다연 등 강자들을 따돌리고 데뷔 첫 우승을 했다. 데뷔 해에 기대만큼 성적이 안 나와 이듬해 2부로 내려간 뒤 지난해 1부 복귀와 함께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이더니 올해 상반기에 챔피언 타이틀을 품었다. 177㎝ 큰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적잖이 관심 받던 박혜준은 우승 기량을 확인하면서 인기가 쑥 높아진 분위기다.
그는 ‘대형 RV(레저용 차량)’를 모는 여자다. “처음부터 큰 차를 몰면 운전이 쉬울 거라는 아빠 말씀에 운전을 카니발로 배웠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차에 관심이 많았고 골프 안 할 때는 자동차 유튜브를 즐겨본다. 피지에서 골프를 익혔고 호주에서 골프가 무르익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2부 투어 도전을 준비하던 때 코로나19가 터졌고 프로 전향할 무대를 찾다가 한국이 최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3부 투어 시험부터 1부 투어 시드를 따기까지 6개월밖에 안 걸린 초고속 승진으로 2022년 KLPGA 투어에 데뷔했다.
박혜준은 드라이버를 정말 잘 친다. 250~260야드의 거리도 거리지만 정확도가 남다르다. 올해 OB(아웃 오브 바운즈)가 한 번도 없고 지난해도 “OB 낸 기억은 없다”고 한다. 보통의 주말 골퍼들과 반대로 제일 자신 있어 하는 게 첫 홀 티샷이다. 다만 그린 주변 어프로치 샷이 부족했다. 놀랍게도 지난해까지 58도 웨지 하나로만 쳤다고. 어프로치 잘하는 레슨 프로를 만나 스킬을 다듬고 52도 웨지도 같이 쓰면서 그린 주변에서 타수 잃는 일을 눈에 띄게 줄였다. 2부 강등 확정 때는 “방 밖에 나가기도 싫을 만큼 비참”했지만 7개월 동안 이렇게 쳐보고 저렇게도 쳐보면서 알게 모르게 성장한 시간이었다.
박혜준은 호주 유학 시절 우승 횟수만 열 번이다. 최근 메이저 대회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호주 교포 그레이스 김이 주니어 시절 경쟁자였다. 원래 목표가 미국이었고 한국에서 정규 투어 우승도 해봤으니 당장 내년 LPGA 투어 진출을 노려볼 만도 한데 박혜준은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5승은 하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응원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잖아요. 일단 롯데 오픈 우승 자격으로 나가는 10월 LPGA 롯데 챔피언십부터 재밌게 치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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