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유상업은행들이 예금 금리를 사상 처음으로 0%대(1년 만기)까지 끌어내린 것은 경기 부양에 사활을 건 중국 당국의 초강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총 300조 위안(약 5경 7800조 원)에 달하는 예금 잔액을 ‘실탄’으로 활용하기 위해 은행이 앞장서 ‘예금 말고 투자나 소비를 하라’고 종용하는 모양새다.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전쟁’에 대비한 내수 살리기 차원을 넘어 경제를 수출 주도형에서 내수 중심으로 전환하는 체질 개선에 팔을 걷어붙였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20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중국 국유은행들이 이날 전격적으로 정기예금 금리를 인하한 배경을 두고 중국 당국의 대응 수위와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까지는 중앙은행인 인민은행(PBOC)이 지급준비율(RRR)을 낮추는 등 간접적인 유동성 공급이 주를 이뤘다. 이달 7일 인민은행이 지준율을 0.5%포인트 인하한 것도 중국 금융권이 약 1조 위안(약 193조 원) 규모의 장기 유동성을 풀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간접 조치로는 경기를 부양하기에 역부족이라는 판단이 국유은행의 실질 이자율을 낮추는 ‘극단적 카드’를 꺼내 들게 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중국의 4월 소매판매는 1년 전에 비해 5.1% 증가해 시장 전망치(6%)는 물론 전월인 3월 증가 폭(5.9%)에도 못 미쳤다. 중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2년 가까이 마이너스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미국과의 관세전쟁까지 더해져 소비 확대의 필요성은 커졌지만 은행에 묶인 돈은 좀처럼 돌지 않고 있다.
전우영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스트래티지앤 파트너는 “중국이 지난해부터 금리 인하 기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당국의 기대만큼 시장에 돈이 풀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 부동산 침체 장기화 등 여파로 중국 가계의 소비심리가 좀처럼 풀리지 않으며 장롱 속에 현금을 꽁꽁 숨겨둔 채 지갑조차 닫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중국은 미국과 일본 등 다른 국가에 비해 저축률이 매우 높은 편이다. 2022년 기준 중국 가계의 가처분소득 대비 저축률은 34.23%로 미국(3.40%), 일본(1.70%)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번 인하 조치 전에도 중국 정기예금 금리가 1%대였음을 고려하면 그만큼 중국인들의 경기 불확실성이 크다는 반증으로 읽힌다. 단적으로 인민은행이 지난해 4분기 50개 도시 거주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다음 분기 주택 가격 하락을 예상하는 사람’의 비율은 21.1%로 상승을 예측한 사람(12.5%)보다 높게 나타났다.
여기에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중국인들의 불안 심리를 더욱 부추겼다. 블룸버그통신은 “팬데믹 당시 중국 전역에 내려졌던 봉쇄 조치는 가뜩이나 높은 저축 선호도를 더욱 높여 놓았다”고 짚었다. 루이싱커피 등 현지 브랜드들이 한 잔에 9.9위안(약 1909원)의 저렴한 커피로 경쟁하고 저가 경쟁을 버티지 못하는 스타벅스가 철수를 검토할 정도로 중국의 ‘짠물 소비’는 대세가 됐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사상 첫 0%대 예금 금리라는 초강수를 꺼내든 배경에는 미국과의 관세전쟁에서 불어닥칠 대외 충격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노림수라는 해석이 나온다. 더 나아가 수출 중심 경제에서 내수 중심 경제로 전환하는 신호탄을 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실제로 글로벌 경제 전문가들은 14억 명에 달하는 인구를 강점으로 가진 중국이 내수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언을 쏟아내고 있다. 홍콩 투자사 PAF의 샨 웨이젠은 “미국의 관세는 오히려 중국으로 하여금 내수를 키우게 만드는 엄청난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경제 체질 전환은 대중 교역액이 큰 한국을 비롯한 글로벌 경제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석유화학부터 전기차 등 첨단산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저가 공세를 이어가며 사실상 글로벌 시장에 ‘디플레이션(저물가)을 수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어서다.
중국 상업은행들로서는 이번 예금 금리 인하가 이자 마진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중국 당국은 그동안 이들 상업은행을 시작으로 민영과 지방 은행들이 대출 금리를 순차적으로 낮추는 식으로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 왔다. 공상은행과 농업은행은 2년 전인 2023년 최대 10%대였던 대출 금리를 지난달 3%대로 낮추기도 했다. 그러나 예금 금리 인하 속도가 대출 금리가 내려가는 것을 따라잡지 못했고 지난해 4분기 중국 은행권의 순이자마진(NIM)이 1.52%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중국 당국이 상업은행들의 예금 금리 인하를 허가해 이들의 조달 비용을 낮췄다는 것도 이번 조치의 의미에 포함된다. 다만 중국이 의도한 대로 내수 부양 효과를 낼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전 파트너는 “매우 낮은 소비심리, 미국과의 무역 분쟁 등 대외 불확실성이 여전히 큰 상황”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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