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미국과의 무역협상에서 강경한 태도로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자, 다른 국가들도 기존의 외교전략을 재점검하고 있다. 일부 국가는 협상 속도를 늦추며 더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18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고율 관세와 관련해 미국과 조기 협상에 방점을 찍고 저자세로 접근했던 주요 국가들 사이에서 실익을 위해 ‘버티기’로 전환하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1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미중 협상 결과 대중(對中) 평균 수입관세율이 종전 145%에서 30% 수준으로 낮아진 데 따른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실상 이번 관세 공세의 핵심 대상이던 중국에 대해 ‘후퇴’를 선택하자 “중국처럼 버텨야 이긴다”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다. 블룸버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중 관세에서 크게 후퇴하겠다는 의향은 지금까지 ‘관세 보복 대신 협상에 임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 온 한국부터 유럽연합(EU)까지 각국 정부를 당혹스럽게 했다”고 평가했다. 미중 협상이 결과적으로 많은 국가로 하여금 ‘미국이 그동안 심하게 우리를 밀어붙였다’고 깨닫고, 협상 전략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 무역 협상가 출신이자 싱가포르의 ISEAS-유소프 이삭 연구소 연구원인 스티브 올슨은 “이번 결과로 협상 역학관계가 바뀌었다”고 평가했다. 투자은행 나티시스의 알리시아 가르시아 헤레로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줄 서 있던 모든 나라가 ‘내가 왜 줄을 서고 있었지’라고 의문을 품고 있다”며 “제네바 협상은 중국이 줄을 건너뛰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명확한 이득이 없어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이중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빠르게 방향키를 바꾸는 대표적인 나라가 ‘관세 협상 공식 1호 국가’인 일본이다. 당초 일본은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을 대표로 하는 협상단을 발 빠르게 꾸려 첫 협상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대면하는 등 속도전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일본의 핵심 요구 사항인 ‘자동차 관세 전면 철폐’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무리한 조기 타결보다 실리’라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일본은 당초 합의 시점을 6월로 잡았으나 지금은 7월 참의원 선거 이후로 무게가 이동하는 분위기다. 현재 일본은 자동차, 철강, 알루미늄 수입품에 부과되는 25% 관세와 기타 일본산 제품에 적용된 24% 상호 관세 철폐를 함께 요구하고 있다.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는 “자동차와 농업을 놓고 서두르면 오히려 악영향이 크다”며 “트럼프와의 협상에서 급할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실제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에게 대미 무역 흑자 중 81%를 차지하는 자동차 산업은 포기할 수 없는 사실상 경제적 성역이다. 특히 지난해 10월 치러진 총선 때 자민당이 하원 의석 과반을 잃는 정치적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관세 관련 성과가 미진할 경우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추가적인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CLSA의 일본 전략가 니콜라스 스미스는 “이시바 총리가 자동차 부문 관세와 관련해 회전하는 칼날이 있는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형국”이라고 묘사했다. 이시바 총리는 자국 내에서 우려가 커지는 미국의 농산물 개방 확대 요구에 대해서도 “자동차 산업을 위한 관세 인하를 얻기 위해 국내 농업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상황은 EU도 마찬가지다. 발디스 돔브로우스키스 EU 경제담당 집행위원은 이번 미중 관세 협상에 대해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EU 내부에서는 이번 합의가 미국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전략이 결여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90일 유예기간 동안 구체적인 로드맵이 부재하다는 점 역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을 끝까지 몰아붙이려는 의지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경제 규모가 작은 국가들은 여전히 신중하다. 베트남은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미국과의 교역에 의존하고 있어 강경 전략을 쓰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달 초 미국의 관세를 ‘부당하다’고 비판하긴 했지만, 실질적인 반격 여력은 부족하다. 브라질, 콜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주요국들은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미국과의 관계도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모든 국가가 ‘중국처럼 버티고 배짱을 부리는’ 전략을 쓸 수는 없다고 경고한다. 중국은 미국이 강경한 입장을 계속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에 대한 영향력이 크지만, 다른 많은 경제권은 그런 협상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카트리나 엘 무디스 이코노미스트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레버리지(협상력)이며, 그 협상력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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