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을 걷고 있다고 하지만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지금이 바둑이 가장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둑은 치매를 예방하고 돈이 들지 않으면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영화 ‘승부’의 실제 주인공이자 전 국회의원인 조훈현 국수는 7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바둑은 처음 배울 때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배워두면 어떤 게임보다도 재미있다”면서 “영화 ‘승부’를 보셨다면 이번 기회에 바둑에도 입문해 보길 권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개봉해 누적 관객 수 140만 명을 넘긴 ‘승부’는 1980~1990년대를 배경으로 사제지간인 조 국수와 이창호 9단의 대결을 다룬 작품이다. 사실상 국내에서 바둑을 정면으로 다룬 첫 번째 영화다. 조 국수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것 같아 기쁘다”며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호평했다.
“사실 바둑은 앉아서 머릿속으로 그리는 게임이라 내면 연기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려나갈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죠. 코로나19 등으로 개봉이 미뤄졌지만 결과적으로 배우들이 프로기사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했습니다. 연구를 많이 한 작품이라고 느꼈어요. 특히 이병헌 배우는 꼭 저를 보는 것 같았죠.”
조 국수는 1962년 만 9세에 세계 최연소 나이로 프로 바둑계에 입단해 20년 만인 1982년 한국 최초로 9단에 오른 바둑계의 전설이다. 그는 1976년 프로 바둑기사로 최고의 영예인 ‘국수(國手)’ 타이틀을 얻은 뒤에도 무려 10년간 국수전에서 우승을 이어갔고 1989년 제1회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 대회에서 당시 중국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녜웨이핑을 꺾고 우승해 바둑 황제로 등극했다.
세계 바둑계 1인자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이 9단은 애제자이자 인생 최대의 라이벌이다. 조 국수는 1984년 바둑 신동이던 이 9단을 내제자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집에서 함께 생활했다. 평창동 자택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연희동에서부터 (창호와) 같이 살기 시작해 6~7년을 함께 지냈는데 평창동은 막판 1~2년을 함께하던 곳”이라며 “원래 스무 살까지 데리고 살다가 내보내려고 했는데 16세에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더 이상 같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스승을 뛰어넘은 제자와 한집에서 사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했다”고 껄껄 웃었다.
영화 역시 조 국수가 이 9단을 제자로 받아들인 후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 국수는 1990년 15세인 제자 이 9단에게 패배한 뒤 줄줄이 10개 타이틀을 빼앗기며 무관(無冠)으로 전락한다. 조 국수는 당시 상황을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에 비유하며 “그만큼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분야를 막론하고 스승과 제자가 1위 자리를 두고 대결을 하는 경우는 잘 없죠. 특히 바둑은 스승이 물러나면 제자들이 그 뒤를 이어 정상에 오르는 게 관례였는데 우리는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제가 너무 오래 정상에 머물렀던 것도 있지만 창호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올라오면서 묘한 상황이 연출됐지요.”
그는 1998년 이 9단을 꺾고 부활에 성공한다. 조 국수는 “당시에는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면서 “국민들이 이런 점에서 나를 높게 평가해주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 9단에게 패배한 뒤 다시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도 전했다. 당시 언론에서 그의 재기를 조명하면서 하루 서너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을 정도로 바둑에만 몰두했다고 전했다. 조 국수는 대국 내내 줄담배를 피우던 소문난 애연가였다. 그는 “담배 때문에 대국이 끝나고 나면 항상 머릿속이 연기로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면서 “건강에도 안 좋았고 마침 담배 규제가 막 시작되던 때여서 끊게 된 것이지 승패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설명했다.
“바둑은 기세다”라며 어린 제자를 크게 다그치는 영화와는 다르게 그는 이 9단의 성장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제지간이지만 둘의 기풍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바둑계에서 흔히 공격형인 조 국수를 창으로, 수비형인 이 9단은 방패로 비유한다. 조 국수는 “창호에게 해준 건 하나도 없다”면서 “스승은 울타리를 쳐줘서 제자가 공부를 하게끔 환경을 만들고 이끌어주는 역할이 전부”라고 말했다. 이어 “나도 스승에게 그렇게 배웠고 창호한테도 마찬가지로 대했다”면서 “바둑은 본인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영역이지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조 국수는 비례대표로 20대 국회에 입성한 뒤 프로기사로는 사실상 은퇴했지만 바둑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여전했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 ‘바둑진흥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해서 ‘바둑의 날(11월 5일)’ 지정을 이끌었다. 평소 바둑을 거의 두지 않는다는 조 국수는 현재 한국기원 프로기사 랭킹 100위권 밖이다. 그는 프로기사로 재기하기보다는 영화 ‘승부’를 계기로 다시 바둑 열풍이 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아울러 보수·진보로 나뉘어 대립·갈등하는 정치권과 우리 사회에 대해 조심스럽게 ‘훈수’를 뒀다.
“수시로 형세가 뒤바뀌는 바둑판에서도 일방적인 경기는 없습니다. 바둑이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헤아리는 ‘수담(手談)’으로 불리는 것처럼 정치권에서도 화해와 타협을 통해 힘을 합쳐나가는 조화가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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