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관세 관련 분쟁 중재 기구인 세계무역기구(WTO)에 대해 분담금 지급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냉전 시대 전후부터 세계 자유무역의 파수꾼 역할을 했던 미국이 무차별 관세 등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이를 폐기하는 행보로 일관하자 글로벌 경제가 30년 만에 고립주의, 다자주의로 재편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로이터 통신은 27일(현지 시간) 익명의 소식통 3명을 인용해 미국이 WTO 분담금을 당분간 납부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미국 대표단은 지난 4일 열린 WTO 예산 회의에서 국제기구들에 대한 기여금 검토가 진행되는 동안 지난해와 올해 WTO 예산에 대한 분담금 지급을 보류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국제지구 기여금 검토가 끝나면 그 결과를 WTO에 통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연방 정부 지출 삭감 추진 정책에 WTO 분담금까지 휘말린 셈이다. 로이터 통신은 소식통을 인용해 WTO가 미국의 분담금 지급 중단이 장기화할 경우에 대비해 ‘플랜 B’를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WTO는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 기구로 지난해 예산은 2억 2500만 스위스프랑(약 3700억 원)이었다. WTO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세계 무역 점유율에 비례하는 분담금 체계에 따라 이 기구의 예산에 11%가량 기여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미국은 2270만 스위스프랑(약 378억 원)을 체납한 상태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였던 2019년에도 WTO 상소 기구의 신규 위원 임명을 막아 기능을 마비시킨 바 있다. 2020년 7월에는 WHO의 코로나19 대응과 중국 편향성을 문제삼으며 탈퇴를 통보하기도 했다. 이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듬해 1월 취임하자마자 철회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재계와 외교가 일각에서는 WTO가 최근 관세 폭탄을 중재할 기구로 떠오르자 트럼프 대통령이 사전에 견제구를 던진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실제 중국은 미국 정부가 자국 제품에 총 2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자 곧장 이 조치가 부당하다며 WTO에 제소했다. 캐나다도 미국의 철강·알루미늄 25% 관세에 맞서 WTO를 찾아 분쟁 협의를 요청했다. 유럽연합(EU)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부과에 대해 WTO 제소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베네수엘라는 미국이 자국 석유·가스를 수입하는 모든 국가에 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나서자 강하게 반발하며 WTO 제소 방침을 밝혔다.
WTO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 미국이 주도한 ‘관세·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모태로 삼는 조직이다. 이후 198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가 대두하고 동구권 붕괴로 무역의 세계화가 빠르게 진전되면서 1995년부터 WTO가 GATT 체제를 대체하게 됐다. 지난 30년 간 세계 무역 체제의 주축 역할을 했던 WTO는 트럼프 대통령이 부추기는 보호 무역주의 확산으로 출범 이후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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