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의 정치화를 경계하고, 재판의 독립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난 17일 6년 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이종석 헌법재판소장이 당부한 말이다. 그는 퇴임사에서 “최근 몇 년 사이 권한쟁의심판, 탄핵 심판과 같은 유형의 심판 사건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며 “정치적 성격의 분쟁이 사법부에 많이 제기되는,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나타나면 뒤이어 ‘사법의 정치화’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는 것은 많은 정치 학자와 법학자들이 지적하는 바”라고 설명했다. 특히 “사법의 정치화 현상은 결국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한 불신을 초래해 헌법재판소의 권위가 추락할 것이며 법치주의 삼권분립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질서를 해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법의 정치화가 헌재에 대한 신뢰성 추락으로 또 이는 헌법에 명시된 삼권분립마저 흔들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다.
41년 가까이 법원에서 근무하면서 헌재 수장의 자리까지 오른 이 소장이 사법 정치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 배경에는 최근 몇 년 동안의 국내 정치 상황이 자리하고 있다. 국회 내에서 해결해야 할 정치적 중대 사안을 재판에 가져가 판단을 받는 정치 사법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게 지난 20대 국회에서 발생한 이른바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충돌’ 사건이다. 해당 사건의 피고인은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더불어민주당 전·현직 의원, 보좌관 등으로 지난 2019년 20대 국회 패스트트랙 의사 절차 과정에서 발생한 충돌에 따른 특수공무집행방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공동폭행) 등 혐의를 받는다. 하지만 사건은 1심 4년째 결과조차 나오지 않은 채 공전하고 있다. 피고인 불출석, 기일 변경 등에 따라 재판이 지연되고 있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분석이지만, 일각에서는 ‘사법 절차를 무시한 정치권의 무능’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국회 내 타협과 협상 기능을 상실하면서 결국 법원에 판단을 넘기는 ‘정치 사법화’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재판부 결정마저 내려지지 못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 그동안 여야를 막론하고, 수사·재판 지연 등 이른바 ‘지체된 정의’에 대해선 거칠게 비난하고도 정작 늦춰지고 있는 본인들 재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정치 사법화가 해마다 한층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기폭제는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에 대한 검찰의 연이은 불기소 처분. 여당인 국민의힘 측은 ‘없는 죄가 만들어지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민주당은 ‘검찰이 대통령 부부를 방위하는 친위수비대, 중전마마를 보위하는 신하, 김 여사가 만든 온갖 쓰레기를 치워주는 해결사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또 심우정 검찰총장에 대한 탄핵 소추 추진과 함께 김 여사에 관련한 각종 의혹을 전방위적으로 수사하는 세 번째 특별검사법 발의도 예고했다.
김 여사 수사에 대해 그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는 만큼 여야 사이 정쟁은 당연할 수 있다. 특히 현재와 같이 대화·타협이 사라진 여야 정치 환경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게 법조계 안팎의 시각이다. 4년 6개월이라는 오랜 기간 수사했고, 결론을 공개하는 자리까지 ‘거짓 브리핑’ 논란에 휩싸인 만큼 여야 또는 야당·검찰 사이 논쟁은 수순일 수 있다. 하지만 특검, 탄핵 추진 등으로 정치 사법화가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걱정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정치권이 검찰에 대한 불신 등으로 특검·탄핵은 추진할 수 있다. 추진 상황에 따라 실제로 이뤄질 부분은 달라질 수 있으나, 최종 결론이 법원·헌재 몫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향후 마지막 판단에 대해 정치권이 재차 불신만 표한다면, 삼권분립은 물론 사법부의 독립·신뢰성만 추락할 수 있다. 현 상황에 대해 법원 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는 이유다.
10년 넘게 법조계에 몸 담고 있는 한 변호사는 “법을 믿지 마라, 법원도 믿지 마라는 식으로 정치권이 사법부를 흔들고 있다”며 “정치 사법화로 인해 국민들이 사법 불신만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이미 만들어진 약속이 잘 지켜지고 있는 지 보는 게 사법부의 본연의 역할”이라며 “정치적으로 논쟁이 이뤄져 답을 찾아야 하는 영역에 대해 사법부가 답을 내리라고 하는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치 사법화로 인해 다양한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등 절차를 통해 합의에 도달하려는 민주주의의 장점마저 희석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각종 정치 사안과 연관된 재판에 대해 여야가 정치적 ‘셈법’을 적용하면서 사법부 신뢰 추락만 부추기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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