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기능이 탑재돼 있지만 전원이 잘 켜지지 않아 무용지물인 기기. 2017년과 2022년 각각 출생한 자녀 두 명을 키우는 맞벌이 가정이 정부의 저출산 대책에 대해 든 생각이다.
출산율 통계는 언제부턴가 발표될 때마다 ‘역대 최저’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정부는 그 때마다 대책을 내놨다. 그럼에도 저출산 문제는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 대책의 내용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아 휴직 제도가 대표적 사례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잠정) 기준 출생아 부모의 육아 휴직 사용률을 보면 남성이 4.1%에 불과하다. 아이를 믿고 맡길 사람이 없으면 엄마의 ‘독박 육아’가 불가피해지고, 결국 여성들은 직장과 육아의 갈림길에 놓인다. 남성은 당연히 육아 휴직을 신청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곳은 공공행정 분야로 여성(80.4%)과 남성(8.8%) 모두 가장 높다. 전국에서 합계 출산율(여성 한 명이 가임 기간인 15~49세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이 가장 높은 곳은 2021년 기준 1.277명을 기록한 세종시고, 가장 낮은 곳은 0.626명의 서울시다. 세종시는 정부 부처와 같은 공공 부문 일자리가 집중돼 있는 반면 서울시는 기업 등 민간 부문 일자리가 집중돼 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다. 공공 부문에서는 법으로 도입된 복지 제도가 상대적으로 잘 작동되는 반면 민간 부문은 그렇지 않다. 정부가 복지 제도를 만들어놓고 사각지대 해소와 같은 관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결과다.
최근 논란이 불거진 근로시간 제도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최대 주 69시간 근로’가 부각되며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정부·여당은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비판의 핵심에는 법으로 정해진 근로시간과 쉴 권리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불신과 불만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에서 출산하려면 막대한 기회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그 기회비용이 앞으로 낮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설 때 비로소 개인은 출산을 선택하고, 사회는 출산율을 높일 수 있다. 그러려면 보조금과 같은 일시적 혜택보다는 안정적으로 육아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정부가 그동안 발표한 대책들이 숱하게 유명무실해진 것을 보면 이후 나올 대책도 같은 길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신뢰를 얻지 못하는 한 역대 최저의 출산율 기록과 대책 발표는 반복될 것이다. 이 악순환을 끝내려면 적어도 출산과 육아에 관한 복지 제도만큼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정부가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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