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까지 일본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했다. 전 세계 반도체 기업 10위권 안에 일본 기업만 6개였다. 정부 주도로 첨단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정교한 계획을 세워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80%를 점유했다. 일본에 밀린 미국은 이를 ‘제2진주만 습격’이라고 평가했다.
그랬던 일본이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일본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을 문제 삼으며 보복 관세를 때렸다. 이도 모자라 1986년에는 1차 미일반도체협정도 맺었다. 일본 기업들은 미국에 저가 반도체 수출을 중단하고 일본 내 미국 반도체 업체 점유율(쿼터)을 두 배로 올리기로 했다.
위기감을 느껴야 할 일본은 자만했다. 일본만의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미국의 견제 정도는 뛰어넘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글로벌 흐름은 ‘설계-제조-후공정’의 각 과정을 전문화된 기업에 맡기는 것이었는데 일본은 여전히 한 기업이 모든 과정을 전담하는 ‘수직계열화’를 고수해 다변화하는 시장 수요를 맞추지 못했다. 한 우물만 판다는 일본의 전통 정신을 바탕으로 시장이 원하는 것과 동떨어진 기술 개발에 매몰되기도 했다. 그 결과 전 세계 반도체 기업 순위에서 일본 기업은 10위권에 단 하나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일본 사례를 꺼낸 것은 우리 산업에 대한 견제가 곳곳에서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해 10월부터 중국에 반도체 첨단 장비 수출을 금지했다. 네덜란드와 일본도 동참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지만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산업에서 약진하는 한국을 겨냥했다는 느낌도 강하다. 유럽도 ‘핵심원자재법’ 등을 통해 원자재의 중국 의존도 탈피를 꾀하고 있어 핵심 광물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 기업에 부담이 되는 실정이다.
일본의 교훈은 자만하면 밀려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도 미일반도체협정 등에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일본과 1992년 2차 반도체협정까지 맺어 1996년까지 10년간 철저히 일본 반도체 산업을 짓눌렀고 일본 업체들도 기존의 경영 방식을 고집한 탓에 서서히 사양길을 걸었다. 우리 역시 단시간 내에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세지는 외국의 압박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정치권은 산업 지원에 뒷짐을 지고, 업계도 현실에 안주한다면 다른 나라에 시장을 잠식당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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