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갤러리바톤. 이 곳의 내부와 외부를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통유리 창에는 지난 2일부터 의미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은빛 숫자가 붙어있다. 숫자는 얼굴이 흐리게 들여다보이는 ‘미러필름’으로 제작 됐는데 빛의 세기에 따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이 숫자는 갤러리 바깥 도로를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도 계속해서 새로운 볼거리다.
이 숫자는 세계적인 현대 미술가 ‘미야지마 타츠오’의 개인전 ‘무한숫자’의 작품 중 하나인 ‘체인징 랜드스케이프’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 2020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갤러리 바톤을 찾은 작가는 “이번 전시는 새로운 신작 회화와 전시 공간에 맞춘 윈도우 설치 작품을 기존의 작업과 함께 소개할 수 있어 의미가 있다”며 전시의 소회를 밝혔다.
미야지마 타츠오는 우리에게 LED(발광 다이오드)로 0을 제외한 1에서 9까지의 숫자를 ‘깜빡이며’ 보여주는 실험적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가는 디지털 시대의 상징인 LED로 점멸하는 숫자를 보여주면서 ‘계속 변화한다, 모든 것은 연결된다, 영원히 계속된다'라는 철학적 키워드를 강조하는데, 특히 국내에서는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입구 바닥을 장식 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잠시 LED 숫자를 한 켠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대신 손톱보다 작은 구슬에 숫자를 기재하고 이를 회화와 어우러지게 하는 ‘비즈 페인팅’이라는 새로운 실험적 작품을 선보였다. 팬데믹 기간 중 작가는 스튜디오에 칩거하면서 다양한 시도와 시행착오로 2cm 크기의 정방형 격자가 균질하게 배열된 화면에 ‘소우주’인 구슬을 대량으로 배열, 거시적인 우주를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늘 그렇듯 ‘0’은 없다. 대신 군데군데 흰색의 빈 공간을 남겨뒀다. ‘0'이 들어갈 자리다. 작가는 “제로는 생명과 기운이 공존하는 하나의 점과 같은 것”이라며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은 공간은 텅 빈 것으로 삶도 죽음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로 자칫 ‘디지털 전도사’인 작가가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왔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소재만 달라졌을 뿐 ‘디지털로 아날로그를 보여줬다’고 설명해야 명확하다. 작가는 우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캔버스 전체에서 숫자 구슬이 들어갈 비율을 설정하고 무작위로 생성된 숫자를 일일이 부착했다. 캔버스에 붙일 숫자를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해 추출한 이유는 인간의 의식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전시는 4월 8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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