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지난해 하반기 바닥을 치고 상승했다. 원인 중 하나로 출근길 약식 회견, 이른바 도어스테핑을 중단해 대통령의 실언이 언론에 나올 일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들을 기회가 사라져 아쉽다는 국민도 적지 않다.
윤 대통령의 고교 동창인 정재호 주중대사도 비슷한 행보다. 겉으로는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언론과의 접촉면을 줄여 비판의 여지를 없애는 모습이다.
국정감사 현장에서 지적받을 정도로 정 대사와 베이징특파원단의 관계는 좋지 않다. 익히 알려진 대로 발단은 지난해 8월 상견례와 9월 첫 월례 브리핑 이후 정 대사의 발언이 실명으로 일부 매체에 보도됐기 때문이다. 당시 행사는 관례대로 모두발언은 실명, 질의응답은 백브리핑 형식으로 진행됐다. 백브리핑은 발언자를 공개하지 않고 보도하는 형태다.
백브리핑 방식만 믿었는지, 그의 말대로 언론 대응이 처음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당시 정 대사는 소신에 가득 차 다소 정제되지 않은 발언도 과감히 이어갔다. 수차례 대사 발언의 진위를 파악한 뒤 일부 매체는 국익과 관련이 없다는 판단 아래 정 대사의 발언을 실명 보도했다. 이후 대사관은 재발 방지를 위해 백브리핑을 관례대로 전면 익명 보도할 것을 주장했다. 특파원단은 사안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대사관에서 내린 결론은 정 대사의 ‘모노드라마’였다. 대사 주재 브리핑은 모두발언부터 질의응답 과정의 질문과 답변도 모두 혼자 하는 방식이다. 특파원은 앉아서 대사의 연기만 보고 있다. 브리핑 66시간 전에 마감한 질문으로 만들어진 대본은 뻔한 내용이라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알맹이 빠진 브리핑이 열렸으니 기사화할 내용도 없다. 기괴한 방식의 브리핑을 지적하는 비판 기사만 연이어 쏟아졌다. 그때마다 대사관은 설명 자료를 통해 해명하기에만 급급했다.
설명 자료를 내는 방식도 해괴하다. 슬그머니 홈페이지에만 설명 자료를 올릴 뿐이다. 기사 수정을 요구하고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기자에게 알리지 않는다. 설명 자료의 대상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훤히 보인다. 설명 자료마다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지만 어떤 노력인지 되묻고 싶다.
변명을 늘어놓다 보니 거짓말도 늘어간다. 최신 현안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지적을 우려해 미중 풍선 사건을 대사 모두발언에 포함시켰다고 반박했지만 녹취록을 수차례 들어봐도 풍선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지난해 8월 실명 보도에서 실명 삭제를 요청했다지만 그런 연락을 받은 적도 없다.
대사관이 생각하는 소통의 의미와 브리핑의 목적을 알고 싶다. 알기 힘든 중국의 현황을 언론을 통해 알리는 것이 브리핑의 주된 이유다. 그 과정에 백브리핑 형식을 둔 것은 대사관과 언론 모두 필요성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실명을 공개해 외교 관계를 악화시킬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실수까지 모두 덮어줄 정도로 언론은 너그럽지 않다. 만약 자신의 발언이 실명으로 나가는 것을 우려한다면 발언 전후로 ‘오프더레코드’를 협의하면 된다. 소통은 그럴 때 하는 것이다.
인원이 많다며 특파원단을 3개 조로 나눠 식사한 것을 세 차례 오찬을 통한 소통으로 포장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런 식이면 전체 오찬에 소그룹 만찬까지 하고 있다는 조태용 주미대사는 소통의 달인이다. 의지만 있다면 현장이 힘들면 화상으로, 이번 주가 휴일이면 다음 주에라도 브리핑을 할 수 있다. 그게 노력이다. 말로만 노력한다고 알아줄 사람은 없다. ‘서로 뜻이 통해 오해가 없다’는 소통의 의미부터 다시 새겨보기 바란다.
미국·일본 등의 대사관에서 백브리핑 룰을 어긴 사례가 없다고 항변하지만 왜 그곳에서는 아무런 문제없이 더 풍부한 내용의 브리핑이 진행되는지 알아보라. 무조건 실명 보도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면 언론에는 펜을 꺾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진다. 정 대사가 취임사에서 ‘국익 앞에서 원팀’을 강조했듯이 언론도 충분히 힘을 보탤 준비는 돼 있다. 한국 언론에 좋은 것만 알리고 비판하지 않는 관영 매체 역할을 기대한다면 한국이 중국처럼 공산당 독재가 되기를 바라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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