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소년은 리어카 가득 볼을 싣고 와서는 잔디가 없는 맨땅에 부었다. 그러고는 줄기차게 샷을 날렸다. 그의 연습은 날이 캄캄해져야 끝나고는 했다. 장갑도 없어 손에는 굳은살이 박이기 일쑤였다. 그 살을 면도칼로 깎아냈다. 그의 실력도 날카로워졌다.
#2. 18홀 코스에 처음 나간 소년은 깜짝 놀랐다. 그린 주변은 물론 코스에 모래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벙커’라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소년은 이 벙커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도시락을 싸들고 집 근처 해변으로 나가 연습하기 시작했다. 모래가 단단한 맨땅에서도 샷을 날렸다.
첫 번째 소년은 한장상(82)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제6대 회장(현 고문), 두 번째 소년은 최경주(52)다. 한장상은 한국 선수 최초로 ‘명인열전’ 마스터스에 출전한 ‘전설’이다. 한국 오픈(1964~1967년)과 KPGA 선수권(1968~1971년)에서 각각 기록한 4연패는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한장상은 국내 무대에서 19승을 했는데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에 연간 대회 수는 고작 2개였으니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1976년에서야 연간 대회가 3개로 늘었다. 최경주는 한국 선수 최초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 진출해 아시아 선수 최다승(통산 8승)을 쌓았다.
대가(大家)끼리는 통한다고 했던가. 서른 살 차이 나는 둘은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맨땅 샷’을 통해 골프의 기초를 단단히 다졌다. 그 외에도 닮은 점이 많다. 한장상은 호적으로는 1940년생이지만 실제로는 1938년에 태어났다. 최경주도 호적보다 2년 앞선 1968년생이라고 말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골프를 시작한 것도 공통점이다. 한장상은 1955년 캐디로 골프와 인연을 맺은 뒤 열여섯이던 1956년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최경주도 변변한 연습장 하나 없던 완도에서 고1 때 골프에 발을 디뎠다. 그들에게는 은인이 있었다. 서울 컨트리클럽 이사장이던 이순용은 한장상이 마음껏 연습할 수 있게 배려했다. 김재천 서울 한서고 이사장은 수산고에 다니던 최경주를 서울로 끌어올렸다.
맨땅 샷은 그들의 골프 인생에 어떤 전환점을 마련했을까. 한장상은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는 도가 트니까 볼이 어떤 곳에 놓여도 칠 수 있게 된 거야. 당시에 월례 대회를 하면 10오버파 정도면 우승을 했는데 별안간 언더파가 나오지 않았겠어. 2등과 점수가 확 벌어졌지. 그러면서 우승을 하기 시작한 거지.”
최경주는 “조금이라도 볼 뒤를 맞히면 헤드가 땅에 박혔다. 뒤땅을 치지 않으려다 보니 헤드가 손보다 먼저 가는 임팩트 포지션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면서 아이언 샷이 정확해졌다”고 말했다. 최경주의 아이언 샷을 실제로 옆에서 지켜본 후배들은 “페이스에 볼이 쩍쩍 달라붙고 맞는 소리가 다르다”고 말한다. 최경주는 지금도 동계 훈련 때면 자신의 재단 꿈나무들과 함께 맨땅 샷을 한다.
한장상과 최경주는 자신들의 시대에서 단연 최고였다. KPGA 투어에서 2위와의 최다 타수 차 우승 기록은 한장상이 1964년 KPGA 선수권에서 거둔 ‘18타’다. 그는 1970년 KPGA 선수권에서는 15타, 1964년 한국오픈에서는 13타 차로도 우승했다. PGA 투어에 이어 PGA 챔피언스 무대에도 한국인 최초로 진출해 첫 우승까지 거둔 최경주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두 레전드에게 맨땅은 그냥 흙바닥이 아니다. 영광을 만든 원천이다. 그들은 매끈하고 부드러운 잔디나 매트를 거부했다. 실제로 맞이할 가혹한 현실인 거칠고 울퉁불퉁한 ‘맨땅’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했다. 아무리 타고난 능력이 뛰어나도 비범함과 지독함이 결합되지 않으면 대가가 될 수 없다. 본격적인 프로 골프 시즌이 개막했다. 지난 비시즌 동안에는 어떤 선수가 남들과 다른 혹독한 훈련을 견뎠을까. 곧 그 주인공이 가려진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