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은 스포츠 발전과 남북 스포츠 외교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지난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한 노 전 대통령은 외교안보담당 정무제2장관, 1982년 체육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거쳤고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이끌었다.
반드시 올림픽을 유치해야 한다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노태우 정무장관은 1981년 9월 4일 올림픽 유치를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하고 이규호 문교부 장관, 노신영 외무부 장관, 박영수 서울시장 등 관계자들에게 범국민적인 유치 활동을 지시했다. 정부의 올림픽 유치 대책반은 즉시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현장에서 활동할 유치단 구성에 착수했다. IOC 총회를 불과 3주일 앞두고 체육계와 재계의 유력 인사 등 107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왕성한 유치 활동을 펼친 끝에 19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의 기적’을 이뤄냈다. 후발 주자였던 서울이 52표를 받아 27표에 그친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 개최는 경제 성장과 국가 대회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꼭 필요했고 경쟁 상대국이 일본이라 국민들은 큰 기쁨을 누렸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1964년 도쿄)에 이어 두 번째, 개발도상국으로는 최초, 세계 16번째로 하계올림픽 개최 국가가 됐다.
1988년 9월 17일 개막한 서울 올림픽은 지구촌 스포츠 축제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분단국가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의 발전상을 전 세계에 강하게 심어줬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대회가 미국과 옛 소련의 대결 구도 속에 반쪽 올림픽에 그친 후 12년 만에 두 진영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화합의 장이었다. 당시 소련과 동독 등 미수교 국가 선수단의 참가는 이후 수교를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16일 동안 300만 명이 넘는 관중이 각종 경기장을 찾았고 우리나라는 12개의 금메달로 종합 4위에 올라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했다. 또한 서울 올림픽 개최 경험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등 대형 국제 스포츠 이벤트 유치와 성공 개최의 기반이 됐다.
남북 스포츠 교류의 상징인 ‘한반도기’도 노태우 정부 시절이던 1990년 탄생했다. 흰색 바탕에 하늘색으로 우리나라의 지도가 그려진 한반도기는 그동안 국제 종합 스포츠대회에서 남북 선수단이 공동 입장을 할 때마다 앞장을 서왔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이 1989년과 1990년 열렸다. 이 자리에서 남북의 국기를 대신할 단기 제정 문제가 논의됐는데 남북이 절충을 거듭한 끝에 한반도기가 단기로 정해졌다. 당시 남북 단일팀 구성은 무산됐지만 한반도기는 1990년 아시안게임에서 남북한이 응원 도구로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단일팀 구성을 포함한 남북의 스포츠 교류는 남북 관계 개선에 윤활유 구실을 했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이 처음 단일팀을 이뤄 난공불락의 만리장성 중국을 물리치고 여자 단체전 우승을 이뤄냈다. 이 때가 한반도기가 국제 스포츠 이벤트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남북 단일팀을 대표한 시기였다. 같은 해 6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도 남북 단일팀이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8강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해 12월 노태우 정부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며 분단 이후 처음으로 적극적인 남북 화해 정책에 나섰다. /박민영 기자 my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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