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9호선 흑석역 4번출구로 나오면 ‘흑석빗물펌프장’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적힌 오래된 벽돌 건물이 보인다. 붉은색 벽돌로 쌓아올린 이 낡은 건물은 개발을 앞둔 주택촌과 이미 개발을 마친 대규모 신축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여 생경한 모습을 연출한다. 반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건물이지만 투박한 외관 탓인지, 아니면 ‘빗물펌프장’이라는 다소 어려운 이름 탓인지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진다.
올해 건축문화대상 계획건축물 부문에서 대상을 차지한 ‘멋진 신세계’는 익숙한듯 익숙하지 않은 이 흑석빗물펌프장을 공공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방법을 고민한 작품이다. 아파트 단지화로 인한 지역 공동체의 단절, 그리고 이제는 피부로 느껴지는 기후위기 등 여러 사회환경의 변화에 발맞춰 흑석빗물펌프장에 도심기반시설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자는 의도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스마트 기술을 활용한 수경재배시스템의 접목이다. 작품을 만든 중앙대 건축학부(건축학 전공) 4학년 안성환·송어진씨는 “작품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의 주요 기술인 수경재배방식과 빗물펌프장의 융합을 제안했다”며 “농산물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을 줄이고 도시기반시설을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되돌려주는 동시에 도시화로 인해 단절된 자연이 다시 도시와 이어지는 지속가능한 새 생태계가 조성될 것”이라 설명했다.
수경재배와 빗물펌프장을 복합화하는 아이디어를 건축으로 구현하기 위해 안씨와 송씨는 고대로마 시대의 수도공급시스템인 ‘아퀴덕트(Aqueduct)'에 주목했다. 아퀴덕트는 완만한 경사로를 활용해 도시 전체에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 시스템이다. 작품 멋진 신세계의 외관은 마치 여러번 포개어 접어올린 종이와 유사하다. 아퀴덕트에서 영감을 얻어 바닥에서부터 옥상까지 완만한 경사로로 연결된 이 같은 형태를 고안했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안씨는 “아퀴덕트는 미세한 경사로 도시 전체에 물을 공급하는 시스템이다. 이를 현대의 빗물펌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구상했다"며 “빗물펌프장은 저수조가 있어 필연적으로 경사로를 포함하기 때문에 이 경사로를 쭉 이어서 건물 전체에 접근할 수 있게끔 하는 공간구조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경사로를 활용한 작품의 구조는 수경재배에 필요한 물 뿐 아니라 공간까지 확보하는 결과를 냈다. 면을 여러번 접어 올린 듯한 구조를 적용해 용적률이 높아지면서 공간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공공 공간에 대한 지역 사회의 요구가 큰 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해 수경재배용 공간 외에도 지역사회를 위한 공간 계획(프로그램)도 다수 배치했다. 안씨는 “흑석빗물펌프장이 위치한 부지는 지하철역과 가깝고 간선도로를 접하고 있어서 개발 압력이 큰 부지다. 그런 만큼 이 부지에 공원을 조성한다고 했을 때 ‘용적률을 높여 복합개발을 해야 하는데 공원이 만들어지면 부족한 공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며 “작품에서 제안한 것처럼 경사로를 활용해 면이 넓게 펼쳐진 공간 내에서 시민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채워넣으면 공원과 공간 확충에 대한 니즈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번 계획건축물 부문의 주제는 ‘우리를 위한 새로운 지구'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 등 현재 떠오르고 있는 시대과제를 고려해 건축의 방향을 고민해보자는 취지였다. 멋진 신세계는 이를 반영해 사회기반시설인 흑석빗물펌프장이 공공 건축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데 집중했다. 안씨는 “빗물펌프장은 공공이 활용할 수 있는 건물이고, 또 빗물펌프장에서 사용하는 빗물도 친환경 에너지다. 이를 현대 기술과 접목하면 공공의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다고 봤다”며 “태양광으로 발전한 전기로 지하에 있는 펌프를 작동시켜 건물 상층부로 빗물을 운반해 수경재배에 필요한 양액을 공급·배수하고, 이를 통해 나오는 농산물을 공공에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지역사회에 녹지와 더불어 맑은 공기를 돌려준다는 점도 이번 건축 계획이 지니는 공공성의 한 부분이다. 빗물이 강으로 흘러온 후 증발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대자연의 순환과 비슷한 문법이다.
작품 멋진 신세계에는 기능성 뿐 아니라 심미성에 대한 고민도 녹아들어있다. 동·서측면과 남·북측면에 각각 다른 입면 계획을 적용해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도모했다. 동측면과 서측면은 빗물펌프장 내부의 설비를 밖으로 노출한 입면이 돋보인다. 건물의 동·서측면은 주변의 보행로와 맞닿아 있는 만큼 보행자가 건물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휴먼스케일(Human Scale)로 건물의 덩어리(매스)를 쪼개 볼륨을 강조한 것이다. 안씨는 “빗물펌프장은 시민들의 삶에 꼭 필요한 기반시설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빗물펌프장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잘 모른다”며 “내부의 설비와 시스템을 노출시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와 이를 생산하는 빗물펌프장의 시설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자는 의도"라고 말했다. 반면 올림픽대로와 간선대로와 접한 남·북측면에서는 건물을 멀리서 바라보는 운전자의 시점을 반영해 입면을 계획했다. 안씨는 “보행자와 달리 운전자는 보다 먼 거리에서 건물을 인지하게 된다. 관찰자의 거리와 속도를 반영해 파사드(facade, 건물 전면부)의 입면 계획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계획건축물 부문 심사위원들은 ‘지역사회, 국가, 더 나아가 지구 전체의 생태계를 고려한 건축물’이라는 주제에 대한 깊은 고민을 확인했다는 평이다. 오종수 심사위원은 “대상을 받은 ‘멋진 신세계’는 주제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를 기반으로 개별 건축을 넘어 도시 인프라와 연계해 미래도시환경에 대한 생태적 고려를 한 점이 돋보였다”고 평했다. 은동신 심사위원도 “빗물펌프장을 도시농업을 기반으로 한 공공 공간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이번 공모의 주제에 잘 부합하며, 실현 가능성도 높은 작품”이라며 “포스트 팬더믹 시대에 뉴 노멀한 건축적 아이디어”라는 평가를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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