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처음으로 한미가 종전선언을 진지하게 논의 중인 사실을 언급한 당일 북한이 돌연 유엔 안보리 제재 위반에 해당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발사했다. 우리 정부가 ‘도발’이라는 표현을 자제하며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둔 가운데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이 '한국 길들이기’에 나섰다고 우려했다.
19일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숨가쁜 외교전으로 종전선언 논의에 불이 붙으려던 찰나 북한이 미국의 레드라인에 가까운 SLBM을 발사했다.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한미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마치고 나와 “한국의 종전 선언 제안에 대해 논의했다”며 “나는 이번 주말 서울에서 이를 포함해 상호 관심사들에 대해 논의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국 고위 당국자가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종전선언을 언급한 만큼 협의에 진전이 생긴 것으로 판단된다.
종전선언은 우리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 분위기를 다시 띄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온 제안이다. 노 본부장은 방미에 앞서 류샤오밍 중국 한반도사무특별대표와와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외무차관으로부터 종전선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냈다. 나아가 한미일 정보수장도 이날 5개월 만에 서울에서 비공개 회동을 갖고 북한과의 대화 재개 방안을 논의했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은 전날 애브릴 헤인스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에게 종전선언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은 이날 유엔 안보리 제재 위반 사항인 탄도미사일을 동해상으로 약 450㎞ 발사했다. 합참은 북한이 신형 잠수함을 건조하는 조선소가 위치한 함경남도 신포에서 미사일이 발사된 만큼 SLBM 시험발사를 추정했다. 올해 들어 여덟 번째 미사일 발사로, 북한은 지난달에만 장거리 순항미사일·열차 발사 탄도미사일·극초음속 미사일·신형 지대공 미사일 등 신 무기만 4차례 공개한 바 있다. 아울러 SLBM 발사는 지난 2019년 10월 '북극성-3'형 수중 발사 후 2년 만으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1718호와 1874호 위반 사항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레드라인(도발 저지선)에 가까운 무력 시위로 평가된다.
청와대는 이날 오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긴급회의를 열고 “북한의 이번 발사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진전시키기 위해 최근 우리와 미·중·일·러 등 주요국들 간 활발한 협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루어진 데 대해 깊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특히 북한이 정부가 종전선언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요국들과의 숨가쁜 외교전을 벌인 시기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점을 꼬집으며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SLBM 발사가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고, ‘도발’ 혹은 ‘규탄’ 등의 표현도 사용하지 않았다. 통일부 역시 “북한이 조속히 대화에 나올 것을 촉구한다”고 발표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은 ‘도발의 일상화’를 노리고 있다”며 “북한이 이중잣대 철회를 요구한 후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우리 정부를 시험대에 올려 ‘한국 길들이기’에 나선 셈이다. 우리 정부가 레드라인에 가까운 SLBM 발사에도 ‘도발을 규탄한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북한은 남북 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이중기준 및 대북 적대시 정책 철폐’를 내걸면서 ‘도발’이란 표현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달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이 독자 개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실험에 참관해 “우리의 미사일 전력은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기에 충분하다”고 발언한 데 대해 “대통령이 기자들 따위나 함부로 쓰는 ‘도발’이라는 말을 망탕 따라하고 있는 데 대해 매우 큰 유감”이라며 ‘북남관계의 완전 파괴’까지 거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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