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9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다음 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며 적극적으로 성 평등 정책을 펼쳐왔던 박 전 시장의 피소와 극단적 선택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직장 내 성폭력을 막기 위한 여러 대책들을 내놓으며 적잖은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최근 공군에서 벌어진 ‘성추행 피해 부사관 사망 사건’이 보여주듯 유사한 사건들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뿐 아니라 직장 내 성범죄를 개인의 일탈이 아닌 조직 문화 차원의 문제로 접근하려는 인식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7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 1월 통과된 성폭력방지법 일부 개정안이 오는 13일부터 시행된다. 이에 따라 공공 기관에서 성폭력이 발생했을 경우 기관장은 피해자의 명시적 반대가 없는 한 사건을 여가부 장관에게 지체 없이 통보하고 수사기관에 신고해야 한다. 또 3개월 안에 재발 방지 대책도 여가부에 제출해야 한다. 앞서 여가부는 박 전 시장 사건 이후 공공 기관의 성폭력 사건 처리 제도 전반을 개선해왔다. 지난해 12월 공공 기관장의 성폭력 사건을 맡을 전담 창구를 신설한 데 이어 올해 1월에는 ‘2차 피해 방지 지침 표준안’을 만들어 2차 피해의 구체적 기준을 명시했다. 이외에도 공공 기관 고위직 대상 폭력 예방 교육 별도로 실시하는 등 각종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제도 개선에 비해 실제 현장에서 느끼는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여가부가 운영 중인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신고 센터에서 진행한 ‘익명 상담’ 건수는 2019년 1,018건에서 지난해 2,817건으로 두 배 넘게 급증했다. 올해 들어서도 1~6월 1,813건에 달하며 지난해 같은 기간(887건)의 두 배를 훌쩍 넘어섰다. 반면 주무 기관에 피해를 실제로 신고한 경우는 2019년 150건에서 지난해 118건으로 오히려 감소했다. 올해 1~6월에도 72건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 같은 상담 건수와 신고 건수의 차이에 대해 황정임 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2차 가해에 대한 두려움과 공정한 조사에 대한 불신 등 신고를 하기 전까지 여러 고민이 들 수밖에 없다”며 “상담이 늘어나는 만큼 실제 신고가 늘지 않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직장 내 성범죄에 대한 피해자들의 문제의식은 높아졌지만 마음 놓고 신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직장 내 성범죄가 근절되려면 제도적 개선 노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가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직장 내 성범죄와 2차 가해는 잘못된 직장 문화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라며 “산업안전보건법의 산업재해 유형에 직장 내 성희롱을 추가해 산업안전과 노동권에 대한 문제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석영미 부산여성연합 대표는 “제도 개선이 곧바로 조직 문화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성별 고정관념에 기반한 역할을 직장에서 요구하거나 성희롱 피해자에게 침묵과 인내를 강요하는 것과 같은 조직 문화를 바꿀 수 있는 성 평등 교육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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