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기를 잘했다 못했다의 눈물이 아니라, 영화가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변요한의 말처럼 ‘자산어보’는 보는 내내 편안했다. 그리고 담백했다. 색을 입혀 보여주려 하지 않고 수묵화처럼 스며들었다. 대중에 알려지지 않은 소재에 흑백까지, 이준익 감독의 도전은 그의 말마따라 새로운 경험과 세계였다. 오직 영화로밖에 볼 수 없는 과거의 그와 현실의 내가 만나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준익 감독은 변방의 작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사회를, 산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자산어보 속 창대의 삶을 따라가 시대를 만나고, 그 세상을 통해 우두커니 서있는 오늘의 나를 바라본다. 관객이 돈을 내고 시간을 내고 호기심을 낸 것에 대한 값을 톡톡히 한다. 느리고 투박하지만, 적응하면 곧 빨려들어간다.
Q. 18일 언론시사회에서 너무 울었다는 변요한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 사실 의사소통을 깊이 안해요. 시사회 끝나고 구체적인 이야기도 없었고. 내가 유독 그래요. 중요한 말은 잘 안하고 쓸데없는 말만 하지. 중요한건 말로 하는게 아니거든. 느끼고 그걸 알아주고, 그걸로 중요함이 유지되는 거니까.
옆에서 보는데 영화가 끝나기 40분 전부터 움직여요. 참느라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더라고요. 배우들은 일반 사람보다 감정의 용랑이 커요. 한번 오면 주체를 못하지. 100% 이해해요. 자신이 창대에 이입해 최선을 다했던 시간이, 감정이 진실되서 그런거에요. 이정은도 설경구 배우도 안 울 줄 알았는데…. 설경구 배우가 안경 들고 눈을 훔치더라고 이정은 배우가 말해주더라고요.
Q. 왜 정약전 이야기를 꺼냈나.
-사극을 많이 찍어본 입장에서 소재만큼은 상업적이 아닌 목적을 두고 상업적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해요. ‘박열’이나 ‘동주’도 마찬가지고. 정약전은 정리가 덜 된 부분이 있어요. 근대 태동기였으니까. 거대한 국가사나 공동체의 기준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그 자체가 오류라고 봐요. 반대로 그 시대 개개인을 살피다보면 그 안에 수많은 차이가 있고, 다양한 계층과 존재성이 있죠. 영화나 소설로 하나씩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정약전에 꽂히기 전에는 황사영에 꽂혔고, 그 전엔 최수운에 꽂혔고.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에게 들어가면, 그 안은 고구마 줄기처럼 가지가 뻗어있어요. 대상을 정해 깊이 들어가면 대사이 주체가 되고, 이 주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또다른 세상을 만나요. 그게 창대에요. 창대의 삶을 따라가면 그 시대가 걸쳐 있거든. 사건보다 인물의 사연에 들아가는 방식이 종전에 찍던 사극과 다른 점이에요.
Q. 흑백을 선택한 이유는
흑백이니까. 칼라는…일상이 모두 칼라잖아요. 모든 것이. 과거를 흑백으로 본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일 것 같았어요. 새로운 경험과 세계를 만나고 싶어 일부러 흑백을 고집했어요. (칼라 버전 이야기도 나오는데) 찍을 때 흑백을 위해 미술 의상 미장센 모든 것이 세팅된 만큼 어려울 것 같은데.
Q. 거대한 돗돔도 신기하고, 자산어보 내용을 그대로 내레이션으로 활용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책 자체는 해양 백과사전이잖아요. 특징적인 부분은 창대가 언급한 것을 많이 활용한거에요. 대표적인게 창대가 아전의 목을 조를 때 자산어보에 갑오징어 관련 내용을 내래이션으로 넣은 거나 “성게 껍질에 알을 낳은 새를 ‘밤송이새’라고 라고 창대가 말 하였다”는 내용이나. 책 안에 창대가 언급된 부분을 주목해서 활용했어요.
이백년 전임에도 정약전이 책 서문에 장창대의 이름을 넣고 그가 말했다고 인용해요. 그건 정약전이라는 지식인의 양심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거든. 창대는 그때말로 상놈이잖아. 무시해도 되거든. 그런데 그렇게 했다고. 그게 정약전의 인품을 증명하는거죠. 인물의 관계성을 배치하면서 구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나리오 쓸 때 접근합니다.
Q.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 모두 적확했다.
-설경구는 상남자 스타일 같은데 자신에게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사람이에요. 구체적으로 사극에서 자신의 상을 그려본 적 없었다는데, 카메라테스트겸 분장을 처음으로 하고 나와더니 내 눈에는 그냥 정약전인거야. 연기 캐릭터 설정 뭐 없어요. 설경구가 하면 그냥 약전이에요. 그런거였습니다.
변요한은 그렇게 연기 잘하는지 몰랐어요 진짜. 어제 영화 보신 분들이 연기에 대한 부분은 이견이 없더라고요.
이정은 배우에게는 실례일 수도 있는데 어머니 같은 분이에요. 창대와 약전의 무대인 집이 가거댁, 이정은 집이잖아요. 객들이 와서 별별 것 다 하는데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원래 살던 사람들 같아요. 그게 왠지 하세요? 이정은 덕분입니다. 다 품어주는 어머니 같은 배우인거죠. 이는 모두 이정은이 가진 아우라의 힘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 중에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이정은이 그런 배우에요. 자기 앞에 선 사람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왔다는 걸 감각적으로 알아요. 영화에서도 처음에는 약전 앞에서 내숭을 떨지만, 막상 집에 왔을 때는 그 사람 전체를 받은거에요. 그게 되는 배우. 연기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런 거니까 되는거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Q. 소재가 될 인물을 잡는 기준이 있나.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지는 인물이 있잖아요. 특정 왕이라든지, 헌신적인 인물이라든지.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다녀요. 그래야 될 것 같아. 영화로서 유리함과 불리함을 따지지 말자고. 사실 윤동주는 유리할 수도 있지만, 반대일 수도 있어요. 이상하게 찍었으면 끝이지. 동주의 순수함을 이딴식으로 담았냐고…. 박열도 잘 몰랐잖아요.
동시대를 살았던 뜨거운 사람이 무수한데 특정 사람만 반복적으로 재소비되는가. 주목받지 못하지만 그 못지않게 뜨거운 사람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내가 있고 네가 있을 수도 있다. 영웅을 표상화 시키면 그 순간 나도 너도 아니다. 보잘 것 없고 소외된 것 같은 사람을 보면 내가 있더라. 송몽규가 그렇고, 가네코 후미코가 그렇고, 이 영화에서는 정약전과 창대가 그래요. 나이 먹을수록 그런 쪽에 흥미가 가요.
Q. 코로나19로 극장이 썰렁한 시기다.
영화의 가치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어요. 하나는 문화적 가치 하나는 경제적 가치. 문화적 가치인 내용에 대한 책임은 감독이 지고, 경제적 가치인 흥행의 책임은 투자사가 져요. 지금 극장들 적자 폭이 상당한데, 힘든 와중에도 철저한 방역 수칙하에 조심스럽게 개봉해서 관객을 쌓아가지 않으면 올해 내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유불리 따지지 않고 극장이 비어있으니 간격을 띄워서라도 뚜벅뚜벅 가자며 개봉을 준비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극장은 그러지만 OTT를 많이 활용하니까 문화생활은 계속 하고 계실 거에요. 100년 이상 지탱해온 영화라는 플랫폼은 앞으로도 지속될겁니다. OTT는 소비자 주도형 플랫폼입니다. 중간에 멈출 수도 있고 재미없으면 딴 작품을 볼 수도 있어요. 반면 영화는 생산자 플랫폼입니다. 불 끄고 돈 내고, 이 시간 아니면 안되는 독재적 시스템이죠. 비민주적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문명을 뚫고 나가는 최전선에 있는 매체에요. 영화가 뚫고 드라마가 확장하는 것이 지난 백년간 영상매체가 발전해온 과정입니다. 영화는 장르를 뛰어넘는 도전의 장인데, 지금은 잠시 머물러있더라도 그 반작용이 아주 클거에요.
/최상진 기자 csj845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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