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 높은 황제였으나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설정 일부는 허구다. ‘로마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이자 ‘명상록’을 지을 만큼 철학자로도 이름 높던 아우렐리우스는 전쟁터에 다니느라 소홀했던 아들을 끔찍하게 아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전선에서 귀환하는 도중에 사망했을 때도 원로원과 친위대는 콤모두스의 이름을 연호하며 19세 황제를 반겼다. 영화 속 로마 장군에서 노예 검투사로 전락한 막시무스의 존재 역시 확실하지 않다. 콤모두스의 아홉 살 위 누이인 루실라에 대한 설정은 정반대다.
콤모두스의 의심병이 도진 계기가 루실라다. 엄마처럼 여겼던 누나가 황제 자리를 탐내 암살을 시도한 직후부터 그는 주변을 죽였다. 불안한 젊은 황제는 330명의 소년·소녀가 있었다는 할렘 아니면 검투장에 빠졌다. 자신을 환생한 헤라클레스라고 믿은 콤모두스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이벤트에 목을 맸다. 대형 공연 등 로마 시민들의 여흥을 위해 재정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재정 고갈에 봉착하자 돈에 손을 댔다. 은화의 함량을 줄여 차익을 취한 것. 악화 남발로 인한 통화 타락(currency debasement) 속에서 로마는 멍들어갔다.
직접 검투사로 나서 735회나 시합을 치렀던 그는 하루에 100마리가 넘는 사자와 곰, 코끼리와 하마를 투창으로 사냥하는 기록도 세웠다. 대중마저 잔혹함에 등 돌릴 무렵, 동물 사냥으로 기진맥진한 그는 목욕 도중 애첩과 친위대장이 고용한 자객에게 목 졸려 죽었다. 콤모두스 사후 로마는 군인들이 상쟁으로 옥좌를 차지하는 군인황제 시대를 맞았다. 아우렐리우스가 자식이 없었던 선대 황제들처럼 양자 양위의 전통을 따랐다면 로마의 전성기는 더 이어졌을까. 잘못 이은 후사가 비단 옛이야기뿐이랴. ‘아빠 찬스’가 판치는 세상을 보자니 남의 일 같지 않다. 사회적 책임이 있는 계층일수록 물불을 가리는 않는 세습 욕구가 강하다. 썩는 생선처럼 위부터 곪아가는 사회의 미래는 뻔하다. 필망(必亡).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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