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이야기로 시작했는데요. 영화 ‘모리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1987년 작품인데 한국에서는 이제야 개봉(11월 7일)하게 됐습니다. 퀴어 영화로는 ‘해피 투게더(1998년 개봉)’ 정도가 있었습니다. 세상이 이제 많이 변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모리스’는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1987년 연출한 작품입니다. 제임스 아리보리 감독은 2018년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각색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영화 역시 남성 간의 사랑을 그린 작품입니다. 또 아이보리 감독은 20세기 최고의 영화로 꼽히는 ‘하워즈 엔드’를 비롯해 ‘인도에서 생긴 일’ ‘전망 좋은 방’ ‘남아 있는 나날들’등을 연출한 거장입니다.
이 거장은 여전히 동성애가 주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1987년 ‘모리스’라는 작품을 통해 금지된 사랑을 용기 있게 작품화했습니다. 그리고 44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 감독상, 남우주연상, 음악상을 수상해 ‘베니스 영화제 3관왕’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됩니다. 남우 주연상은 국내에도 팬층이 확고한 휴 그랜트(클라이브 역)와 제임스 윌비(모리스 역)가 맡았습니다. 휴 그랜트는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 ‘러브 액츄얼리’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등에 출연해 여성들에게 커다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소위 말해 ‘멜로 장인’입니다. 두 배우는 조심스럽고 복잡하고 섬세한 사랑의 감정을 정말이지 ‘상을 받을 만하게’ 연기했습니다.
우선 ‘모리스’는 아이보리 감독의 섬세하고 우아한 연출이 돋보입니다. 그가 다루는 사랑이라면 그게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아름다운 로맨스가 될 것도 같습니다.
영화는 세계 1차 대전 직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배경으로 합니다. 2학년이던 모리스와 3학년이던 클라이브는 우연히 학교에서 만나고, 서로의 감정을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서서히 알아 차리게 되고 이를 인정하게 됩니다. 당시 동성을 사랑하는 것은 타락한 것이고, 악마의 유혹에 빠진 것이며, 동성 끼리 애정을 표현하다가 누군가에게 발각되는 순간 사회적 지위와 명예는 모두 잃게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목격자가 신고를 하지 않는다면, 목격자에게 온갖 협박을 당하면서 돈을 뜯기던 그런 시절이었기에 이들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최대한 모른 척 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흔한 말로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가난, 기침 그리고 사랑’이라고 했죠. 이들 역시 서서히 커져가고 확신하게 되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같이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고, 어쩌다 장난을 치게 되고, 이런 일상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들이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아직은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 있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보면 그렇게 불편할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아이보리 감독의 작품인 데다 1987년 작품인 까닭에 더욱 영상은 서정적입니다. 물론 파격적인 노출신도 있습니다. 1987년에도 저렇게 파격적인 노출이 가능했나 싶을 정도입니다.
모리스와 클라이브의 사랑이 애처롭고 위태로워 보이는 장면들에서는 애가 타기도 합니다. 하녀들과 집사는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둘이 사랑을 한다는 것을 눈치챕니다.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눈길로 이 둘의 사랑을 넘겨 버려 침묵 속에 묻기도 하고, 언듯언듯 불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 둘의 관계를 알지만 모른 척 할게’라는 눈빛과 말투는 두 사람을 아마도 숨막히게 만들었을 겁니다. 당시 영국 상류층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다녀, 이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이 공개되니 말입니다. 하인들은 어쩌면 이들에게 빅브라더나 CCTV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빅브라더와 CCTV는 이동도 가능하며, 소문을 낼 수도 있는 더욱 어쩌면 두려운 존재였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또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모리스와 클라이브는 갑작스럽게 이별을 하게 됩니다. 동성과 사랑을 나누다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은 귀족 리슬리를 보고 충격을 받은 듯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던 클라이브는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옵니다. 그리스 여행을 간 클라이브에게 연락이 없자 모리스는 초조해합니다. 마치 연인에게 보낸 메시지 옆에 1자가 없어지지 않고, 없어져도 대답이 없을 때의 그 답답함을 오지 않은 편지 답장으로 모리스는 불안해합니다. 연락 두절, ‘잠시 시간을 가져 보는 게 어때?’ ‘정리를 좀 해봤어’ 등은 이별의 시그널이라는 것은 1900년대 초나 2019년이나 남녀 간의 사랑이나 동성 간의 사랑이나 불변의 진리인가 봅니다. 클라이브는 모리스에게 이별을 고하고, 이성애자로 살아갈 것을 선언합니다. 사실 모리스보다 적극적이었던 것은 클라이브였습니다.
둘은 헤어지고 각자에게 사랑이 찾아옵니다. 클라이브는 앤이라는 여성이 그리고 모리스에게는 사냥터지기 스커더가 각각 찾아옵니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택한 클라이브와 오직 사랑만이 중요한 모리스의 삶은 너무나 다릅니다. 클라이브는 결혼해서 이성애자로 살아가고, 모리스는 또 다시 찾아온 열정적인 사랑에 모든 것을 겁니다. 영화에서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이들은 불행해지는 결말이 흔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불행한 결말을 원치 않았을 수 있고, 편견과 싸우려면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관객들에게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영국을 대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작가 E.M. 포스터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그의 소설인 ‘인도로 가는 길’은 2005년 타임이 선정한 ‘100대 현대 영문 소설’에 오를 정도로 현재에도 사랑을 받고 있죠. 그의 작품인 ‘인도로 가는 길’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 ‘몬테리아노의 연인’ 등이 영화화됐습니다. ‘모리스’는 포스터의 경험이 바탕이 된 소설로 ‘내가 죽기 죽거나 영국이 죽기 전에는 이 책을 출간 할 수 없다’고 했답니다. 초고를 본 친구인 크리스토퍼 아이셔우드는 출판을 권했지만 1914년 완성된 이 소설은 포스터가 사망한 이후인 1971년에 그의 원고를 갖고 있던 아이셔우드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포스터는 소설에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이야기와 실제 연인이었던 휴 메러디스와의 경험을 소설에 과감하게 담았습니다. 영화에서도 과감한 몇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당대 도덕적 규범에 반하는 용기있는 시도는 이렇게 힘겹게 소설로 영화로 나오게 됐습니다. 1914년에 쓴 소설이 1971년이 돼서야 출간되고, 1987년에 영화로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는 2019년에 30년 만에 개봉을 하는 겁니다. 100년을 지나 한국에 온 셈입니다. 100년 전 소설에 대한 반응과 현재 영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과연 어떨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대도시의 사랑’을 독자들이 받아들이듯 영화 역시 그럴까요. 100년 전 포스터는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이름 없는 사랑’을 말이죠. 때 마침 소설 ‘모리스’ 출간됐습니다.
영화를 보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1987년 당시의 휴 그랜트입니다. 부드럽고 우아하면서도 지적인 영국식 영어 액센트는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요. ‘모리스’는 바로 그가 신인 시절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이었고, 이 작품으로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쥐게 되는 출세작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영화의 첫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첫 장면에서 모리스는 선생님으로부터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듣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생식을 통해 자식을 낳는 의무가 있다는 식의 가르침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여자 형제들과 자란 모리스에게 남자로서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선생님이 유일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남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즉 젠더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닌 것이냐고 관객들에게 질문으로 시작했다는 생각, 그리고 이 질문이 아마도 영화가 넌지시 전하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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