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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권력에 기댄 갑부의 말로

1451년 자크 쾨르 몰락

프랑스 중부 부르주에 있는 자크 쾨르 동상




자크 쾨르(Jacques Coeur). 프랑스 역대 최고 갑부로 꼽히는 인물이다. 국제 분업과 신항로 개척으로 재산을 모았으며 현대 물류업(logistics)의 시조로도 손꼽힌다. 혁신 경영의 상징으로도 유명하다. 부르주의 상인 집안에서 그가 태어난 1395년 무렵 프랑스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흑사병이 전국을 휩쓸어 노동력이 부족해진 가운데 영국과 100년 전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누구도 새로운 사업을 꺼리던 분위기에서 그는 1429년 국제 무역의 첫발을 디뎠다.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흑사병의 피해가 가장 컸던 ‘죽음의 어촌, 나르본’을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자크의 셈법은 달랐다. ‘돈이란 강과 바다가 있는 곳에 모이고 길을 따라 움직인다’는 확신에 따라 장소를 골랐다. 나르본은 부동산 가격이 낮은 항구였을 뿐 아니라 로마시대에 건설된 대로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대외무역도 가능했다.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한 사업은 팽창 가도를 달렸다. 비결은 동방무역. 시리아 일대에서 동양의 비단과 차·향신료를 모아 알렉산드리아·나르본을 거쳐 전 유럽에 팔았다. 운하와 강을 통해 내륙의 리옹까지 물건을 보내는 시스템도 깔았다.



동방무역의 중간상 베네치아를 제치고 직거래 망을 구축한 자크는 사업 시작 불과 4년 만에 프랑스 최대 갑부로 떠올랐다. 국왕 샤를 7세에게 전쟁비용을 댄 자크는 1436년 왕실 재산관리인으로 뽑혔다. 화폐개혁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니 저축과 투자가 늘어났다. 더욱더 동방무역에 매달린 그의 재산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궁정 내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1441년 귀족 작위를 받고 여러 도시에 국왕의 대리인 자격으로 파견을 나갔다. 강과 도로의 대부분은 자크의 수중에 떨어졌다. 프랑스 해군보다 강력한 사설 무역함대를 운용했던 자크는 4촌을 이집트 대사로 보내고 교황에게 동방무역에 대한 승인까지 얻었다.

종말이 찾아온 것은 1450년. 국왕의 애첩이 죽자 온갖 모방이 따라붙었다. 돈을 빌린 귀족층 전체가 채무를 불이행하려 근거 없는 소문을 터트렸다. 아그네스 독살에서 국내 금의 무단 해외 반출, 기독교인 박해 등의 혐의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났지만 샤를 7세는 1451년 7월31일 전 재산 몰수와 체포령을 내렸다. 22개월의 고문과 투옥 끝에 자크는 1455년 프랑스를 탈출, 교황청으로 달아나 1년 뒤 쓸쓸하게 죽었다. 정치에 지나치게 기댄 갑부의 말로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이젠 없어졌다고 믿고 싶지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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