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 퍼졌다. 이를 두고 흔히 ‘나라 잃은 설움’에 독립 만세를 목놓아 불렀다고 이야기한다.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연해주 한인 사회는 1919년 3·1운동 전부터 대한국민회의를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최재형이 있었다. 이로 인해 최재형은 1920년 일본의 연해주 한인 학살, 이른바 ‘4월 참변’ 당시 일본군의 주요 표적이 돼 사망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최재형의 삶을 살펴보면 그가 단순히 나라 잃은 설움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재형은 일찍이 국제 정세에 눈을 뜨고 이를 바탕으로 연해주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한인이었다. 그의 성공은 안중근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를 후원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여기에는 중국의 동북 지역 간도에서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하던 이범윤 역시 포함된다.
당시 이범윤은 연해주에서 최재형의 도움을 받아 식객으로 지내기도 했으며 연해주에 사는 한인에게 “강동(江東)의 여러 동포는 주의하여 조국을 회복하오. 선능(先陵)도 대한강산이오, 인종도 대한인이니 아무리 타국에서 포식한들 엇지 조국을 모르리요”라고 편지를 보내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한 후원을 호소했다.
다만 이범윤의 호소를 인생의 대부분을 타국에서 보낸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다. 더욱이 당시 연해주에 살고 있던 한인의 상당수는 생존을 위해 조선에서 도망치듯 떠나와 연해주에 정착했다. 그들에게 조선에 대한 기억은 즐거웠다고 회상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는 최재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재형은 구한말 함경도 경원군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만일 그가 조선에 남아 있었다면 노비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노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열 살 무렵 그의 일가족은 여느 사람들처럼 가족을 이끌고 도주해 연해주로 이주했다. 굶주림을 피해, 생존을 위해 내린 불가피한 행동에 가까웠다. 이런 경험이 당시 어린 최재형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을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범윤이 이야기한 그런 조국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재형은 연해주에서 안중근을 비롯해 홍범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에 실질적으로 참여했다. 혹자는 최재형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을 두고 이범윤의 포상에 호응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함경도 출신은 벼슬에 욕심이 많다는 ‘뒤바보’ 등의 평가를 근거로 역시 함경도 출신인 최재형도 피차 같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럴 수도 있다. 사람 속을 어찌 알겠는가.
다만 대한제국은 일본의 국권 침탈로 포상을 약속했다는 황제조차 지위를 보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국 지배는 공고해져 가고 있었다. 이런 대한제국과 일본의 상황을 국제 정세에 밝은 최재형이 모른다는 것이 이상하고 러일전쟁 상황을 직접 목도한 상황에서 지위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황제가 보장했다고 해서 그 벼슬 욕심 하나에 의지해 병합 후까지 헌신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동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는 것이 더욱 유리했을 것이다.
최재형의 독립운동은 한말 여러 차례 국내를 방문한 영국 지리학자 이저벨라 비숍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주장한 정치의 중요성에 보다 방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숍은 한말 잘못된 정치로 이 땅에 사는 이들이 삶의 희망을 뺏겼다고 주장했다. 본래 비숍은 우리 민족이 원래 열등한 민족이기에 삶에 희망조차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비숍은 이런 생각을 연해주를 돌아본 후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비숍은 당시 이 땅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상황은 민족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정직한 행정(an honest administration)과 보호(protection)’를 정치적으로 결여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고 평가했다. 반면 연해주에서는 한인 촌장 등에 의해 정직한 행정과 보호가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에 연해주에 사는 한인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정치적 보장을 행하는 주체가 러시아 정부가 아닌 최재형 같은 한인 리더라는 점이었다.
최재형의 삶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 러시아로 이주해 연해주에서 대부분을 보냈다. 이때 최재형은 연해주에 주둔한 러시아 군대에 주로 고기 등을 공급해 경제적 부를 축적했다. 이 과정에서 최재형은 러시아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도헌’이라는 지역을 대표하는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최재형은 이를 통해 또 다른 부와 권력을 축적할 수 있었지만 이보다 동포와 함께하는 길을 택했다. 이를테면 최재형은 러시아어에 능통해 각종 사업에 통역으로 참여했다. 여기서 그는 한인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그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이러한 최재형의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재러 한인교육이었다. 그는 각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고 심지어 자비로 러시아 주요 도시에까지 한인 학생을 유학 보냈다. 그중에는 한명세, 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최 레프 페트로비치, 김 로만 이바노비치, 김 야코브 안드레예비치 등이 있었다. 최재형이 재러 한인교육에 앞장선 것은 배움이 권리를 지킬 수 있는 토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한국을 침략했고 최재형 가족이 살던 얀치헤 지역까지 위험해졌다. 이로 인해 최재형은 그때까지 살고 있던 얀치헤를 떠나 크라스키노로 가족을 이주시켰다. 러일전쟁의 여파는 이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최재형을 포함해 많은 한인이 러시아군에게 일본 첩자로 몰려 위협받거나 러시아에서 추방당했다. 최재형 역시 마찬가지로 위협받았고 추방에 직면하기까지 했다. 최재형은 자신을 포함해 동포의 권리를 보호하고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하게 인식했다. 연해주의 한인은 절대 일본과 가까워질 수 없으며 우리 민족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독립이었다.
비록 그는 1920년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략하면서 일본군에 체포돼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조국의 독립을 지켜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개인의 이익이 아닌 동포의 미래를 위해 독립을 설계하던 그의 꿈은 교육으로 다른 이들에게 계승됐고 결국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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