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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위장 평화 속 전쟁 준비

1802년 영국 프랑스 등 '아미앵 화약' 체결





‘1802년 3월25일, 아미앵 조약이 체결되자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사 권위자인 그레고리 프리몬트반스 영국 육사 교수 등이 공저한 대작 ‘나폴레옹 전쟁’의 첫 문장이다. 아미앵 조약은 영국과 프랑스 간 3년 협상에 네덜란드·스페인 등이 동의한 다자간 평화조약으로 ‘아미앵 화약(和約)’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은 각국 점령지 철수와 반환, 억류 포로 석방 등을 내용으로 담았다. 영국에서도 이 조약을 반겼다. 평화가 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이 터진 이래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던 유럽 대륙은 평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더욱이 영국과 프랑스는 1702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시작으로 4국 동맹 전쟁, 젱킨스의 귀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7년 전쟁을 거쳐 미국 독립전쟁에 이르기까지 신물이 나도록 싸워왔기에 평화에 대한 갈망이 컸다. 정작 양국의 본심은 달랐다. 불리한 여건에서 전투를 치를 때마다 승리해 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33세의 수석 집정관 나폴레옹은 ‘최종적인 평화협정을 맺었다’고 자화자찬했으나 영국 본토 침공까지 시간을 벌 요량이었다.

영국 역시 러시아 등과 관계가 틀어져 고립된 마당. 먼저 협상을 요구한 나폴레옹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이 ‘프랑스 공화국’을 인정하면서 ‘영국 왕이야말로 합법적인 프랑스 국왕’이라던 영국 왕실의 수백 년 묵은 주장도 사라졌다. 양국은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전쟁을 준비했다. 프랑스가 광활한 북미 대륙 영토(루이지애나) 매각에 나선 이유도 도버 해협을 건널 해군력 건설비 마련에 있었다. ‘위장 평화’ 속에 긴장으로 대립하던 양국은 서로 협약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며 1803년 5월 평화조약을 깼다. 영국은 전쟁 불사를 선포하고 프랑스는 국내 거류 영국 남성 체포 및 억류로 맞섰다.



양국의 치밀한 머리싸움의 최종 결말은 주지하듯이 영국의 승리로 귀결됐다.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을 물리친 영국의 저력은 경제력에서 나왔다. 나폴레옹 전쟁이 절정이던 1813년 프랑스는 2억9,800만파운드의 전비를 지출한 반면 영국은 8억8,600만파운드를 썼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등 동맹국에 뿌린 원조도 2억7,400만파운드에 이른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으로 영국 경제의 목줄을 쥘 생각이었지만 되레 프랑스 경제권이 봉쇄의 후유증을 앓았다. ‘영국과 프랑스 간 전쟁과 평화’를 종착점으로 이끌고 간 힘은 경제에 있었던 셈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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