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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계진 전 의원] "茶와 함께하는 대화엔 양보와 타협·존중이 녹아있죠"

40년전 茶와 첫 인연 맺고부터

여유 생기고 느림의 미학 알게 돼

茶세계로 이끈 지인만 100명 훌쩍

초등생 손주들에게도 다도 가르쳐

강원지사 낙선후 정치와 거리 두고

국군방송 진행하며 청취자와 소통

방송인·농부·茶人의 삶에 만족

다시 정치권 나갈 생각 별로 없어





“‘차(茶) 한 잔의 여유’라는 말이 있죠. 차는 술처럼 ‘원샷’을 하거나 급하게 마셔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차를 마시다 보면 숨겨져 있던 여유를 찾게 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매력이죠.”

‘국민 아나운서’ ‘신사 정치인’으로 통하는 이계진(72) 전 국회의원은 지인들 사이에서 ‘차 전도사’로 불린다. 불교신자인 그에게 ‘전도사’라는 별칭이 안 어울릴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차를 즐기고 또 차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고 한다.

차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경기도의 한 산골에 있는 그의 자택을 찾았을 때 탁 트인 넓은 잔디마당과 연못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1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큰 탁자가 놓인 공간으로 안내했다. 손님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응접실이다.

이곳에는 찻잔을 씻을 수 있는 싱크대도 있고, 특히 눈에 띈 것은 벽에 장식해놓은 갖가지 종류의 다기들이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다기들은 언뜻 보기에도 20여종은 돼 보였다. 녹차를 비롯해 우롱차·보이차·꽃차 등 차 전문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종류도 많았다. 그의 차 사랑이 그저 좋아하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는 것을 넌지시 말해주는 듯했다. ‘KBS 간판 아나운서’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이 아니었으면 ‘요리계의 백종원’처럼 ‘차의 장인’ 또는 ‘차의 달인’으로 유명해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차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지는 40년 가까이 됐다. 차를 가까이하고 나서부터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느림의 미학’도 알게 됐다며 차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1982년쯤이었죠. 당시 KBS에서 ‘11시에 만납시다’라는 토크쇼를 진행했는데 몸과 마음이 바빴고 피로감도 많았습니다. 이때 한 지인으로부터 차를 꾸준히 마셔보라는 권유를 받고 시작했는데 여러 가지 차를 즐기면서 마음의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그가 느낀 차의 매력은 ‘여유’뿐이 아니었다. 지인들과 차를 마시다 보면 좋은 이야기가 주로 오간다는 게 또 하나의 장점이다. 정치·경제 이야기 등을 하며 자신의 이념과 주장을 펼치다 싸움이 일어나는 여느 술자리와 달리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는 논쟁하거나 다투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차를 마시고 대화할 때 테이블을 치면서 ‘대통령이 어떻고, 남북관계가 어떻고…’ 하며 언성을 높이거나 싸우는 일은 본 적이 없다”며 “차도 나름대로 예법이 있고 그 속에서 나누는 대화에는 양보와 타협 그리고 존중이 녹아 있다”고 말했다.

“차의 예법은 그리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습니다. 바른 자세로 앉아 두 손으로 마시는 등의 형식적인 예법이 아니라 대접해주는 사람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마시는 게 기본 예법이죠. ‘고마움’이라는 마음가짐이 바탕에 있으니 차를 마시면 큰 소리도 안 나고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차에는 ‘고마움’이라는 게 담겨 있으니 아이들에게도 다도(茶道)를 가르치면 인성교육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에 그는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인 두 손자에게도 차를 가르쳤다. 차분한 성격의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아니면 차를 어릴 때부터 배워서인지 손자들 역시 웬만해서는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차를 즐기는 또 하나의 매력으로 그는 ‘다기 모으기’를 꼽았다. 다기 세트는 보통 주전자·잔·받침대·거름망 등이 기본이다. 그는 직접 사기도 하고 선물로 받기도 하면서 여러 종류를 소장하게 됐다.

그는 “서예나 미술을 하는 사람들은 붓 모으는 재미가 있고 낚시가 취미인 사람은 낚싯대를 모으는 재미가 있듯이 차를 즐기면서 다기를 모으는 것도 쏠쏠한 재미”라며 “다기를 집안에 장식하다 보면 분위기도 달라지고 집에 오는 손님이 궁금해하면 설명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칠순을 넘긴 그는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편도 2시간가량의 거리를 직접 운전해 출퇴근하고 농사를 지을 정도로 건강도 좋다. 그의 동안과 건강의 비결은 차일 것이라고 지인들은 추측한다. 차가 건강에 좋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고 요즘은 ‘차 건강법’이 인터넷과 서적을 통해 많이 퍼져 있다.

차와 건강의 관계에 대해 그는 “차가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말 그렇다면 병원이라는 게 필요하겠냐”면서 “‘차가 건강에 어느 정도로 좋으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나는 ‘나쁘지는 않다’고 대답한다”고 차를 과신하지 말 것도 당부했다.

“저 때문에 차를 마시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몸에 해로운 담배나 술을 제가 가르쳤다면 미안함이 들 텐데 저한테 차를 배우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뿌듯하고 또 고맙죠.”

그가 차의 세계로 이끈 지인들만도 어림잡아 100명이 넘는다. 아나운서 시절에는 선후배 아나운서들에게 차를 권했고 국회의원이 시절에는 동료 의원, 보좌관, 국회 출입기자들에게 차를 알렸다. 일부러 차를 강요하거나 차의 매력을 설파하고 다닌 것은 아니다.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차를 대접했고, 이때 누구는 단순히 차만 마시는가 하면 누구는 차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면서 관심을 나타냈다.

차를 대접했던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지만 이 가운데 다기 세트와 여러 종류의 차를 사서 즐기게 된 지인들이 100여명이다. 그가 권해 차를 마시게 된 지인들은 종종 집을 찾아와 함께 차를 즐기며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이는 이 전 의원에게 차를 전파한 보람이고 즐거움이다.

그는 전업작가 못지않게 책도 많이 펴냈다. 방송계의 각종 에피소드와 떠돌던 야사를 모은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은 1992년 출간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외에도 ‘남자도 가끔은 옛사랑이 그립다’ ‘정말 경찰을 부를까?’ ‘솔베이지의 노래’ ‘이계진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주말농부 이계진의 산촌일기’ ‘똥꼬 할아버지와 장미꽃 손자’ 등 소설·수필·에세이의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작가로서의 재능도 보여주고 있다. 글이 차를 부른 것인지 차가 글을 부른 것인지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둘의 조화가 나름 딱 맞아 떨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차에 대해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그가 당연히 차에 대한 책 한권쯤은 손쉽게 펴낼 법도 하겠지만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도 차에 대해 배우고 있는데 차를 주제로 책을 낸다면 차 전문가들에게 건방져 보일 수 있습니다. 미지근한 물로 우려내는 차, 첫 물은 버리고 두 번째 우린 물을 마시는 차 등을 설명해주다 보면 내가 차 전문가로 보일 수 있지만 난 그저 차를 좋아하는 ‘차인(茶人)’일 뿐입니다”



제17·18대 재선 국회의원으로 2010년 강원도지사에 출마했던 그는 이광재 전 지사에게 근소한 표 차이로 패했고 이후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2011년 이 전 지사가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돼 유죄 판결을 받아 도지사직을 상실하자 당시 한나라당은 그에게 보궐선거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선거의 패배를 인정하고 승복했는데 다시 선거에 나갈 수는 없다. 한나라당이 경선을 통해 좋은 후보를 뽑아달라”며 백의종군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 시골농부의 삶을 살고 그는 2013년 4월 국방홍보원이 운영하는 라디오 ‘국방FM’의 시사 프로그램 ‘국민과 함께 국군과 함께’ 진행자로 방송에 복귀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청취자들과 만나고 있다. 또 한국차인연합회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차에 대한 공부도 꾸준히 한다.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농사를 짓고 차를 즐겨 마시는 지금의 방송인·농부·차인 생활이 좋은데 다시 정치권에 나갈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지인들과 만나 차를 즐기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여유를 느끼는 이 생활이 즐거울 뿐입니다.”
/김정욱기자 mykj@sedaily.com

he is

△1946년 강원도 원주 △1965년 원주고 졸업 △1970년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3년 KBS 공채 1기 아나운서 입사 △KBS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TV는 사랑을 싣고’ ‘체험 삶의 현장’ ‘이계진의 아침마당’ 등 진행 △1992년 SBS 입사 △SBS ‘모닝와이드’ ‘한밤의 TV연예’ 등 진행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한나라당) 당선 △2005년 한나라당 대변인 △2007년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한나라당 간사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한나라당) 당선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강원도지사 출마 △2013년 국방FM ‘국민과 함께 국군과 함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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