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 7월18일 런던에서 가진 한국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오는 9월 유엔총회 동안 남북미 3국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판문점 선언에서 명시했던 대로 올해 내로 종전 선언을 추진하겠다”고도 했다. 강 장관의 이런 발언들을 놓고 학계 일각에서는 1989년 미소가 몰타 선언을 통해 유럽의 냉전 종식을 선언했듯 남북미 정상회담이 한반도 냉전체제의 해체를 알리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4·27 남북 정상회담, 6·12 미북 정상회담, 그리고 이후 고위급회담·장성급회담·체육회담·적십자회담 등 빈번해진 남북 소통과 대화 분위기가 이런 기대감을 키우고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만으로 한반도판 몰타 선언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듯하다.
유럽 냉전체제 종식의 시발점은 1975년 8월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정상회담이 채택한 헬싱키 선언이었으며 이 선언이 나오도록 발동을 건 것은 1970년 3월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외교’ 선언과 이어서 개최된 동서독 정상회담이었다. 서독이 자신들만이 유일 합법정부임을 주장하는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 Doctrine)을 포기하고 동독을 정상국가로 인정한 것이며 이것이 유럽의 데탕트에 불을 지핀 것이다. 헬싱키 선언으로 동서 진영은 현 국경선 인정, 공산권 진영의 인권문제 개선, 양 진영 간 상호 경제 및 인적교류 향상 등 3대 의제를 진전시키는 데 합의했고 소련도 동참했다. 현 국경선을 인정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소련군 점령 지역을 영구화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서방 측이 불만족스럽게 생각했지만 인권 개선 논의는 유럽의 대변화를 견인하는 기관차가 됐다. 1989년 여름 동독인들은 ‘여행의 자유’를 외치며 대탈출을 시작했고 그 바람이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총선거 및 서독으로의 흡수통일을 지지하는 기독민주당의 압승, 1990년 10월3일 독일통일, 1991년 말 소련연방 해체 등을 견인해낸 것이다.
이런 대변화의 바람 속에서 1989년 12월 미국의 조지 HW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몰타에서 만나 “이제 미소는 더 이상 적이 아니며 냉전은 끝났다”고 선언했고 이어서 1990년 11월21일 CSCE 정상회담이 채택한 파리 헌장이 “유럽에서의 대결과 분열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함으로써 유럽의 냉전체제 청산과 독일통일은 마무리됐다. 그래서 지금 학계 일각에서 유럽의 냉전청산 역사를 회상하면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미북 정상회담이 한반도의 대결과 긴장을 청산하는 아시아판 몰타 회담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기대감이 분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대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우선, 현 동아시아 정세는 데탕트 바람이 거세게 불던 당시 유럽과는 많이 다르다. 지금은 중국의 팽창주의 대외기조와 러시아의 강대국 복귀 시도로 인해 아시아에서 미중 간, 그리고 유럽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러시아 간 신냉전이 부활하는 중이고 중국·러시아·북한 등 사회주의 블록이 전략적 제휴를 통해 미일동맹을 주축으로 하는 서방 해양세력을 견제하는 중이다. 바로 이 신냉전이 중국이 겉으로는 유엔의 북핵 제재에 동참하면서도 뒤로는 북한정권의 생존을 돕는 이중적인 자세를 보이게 한 배경이다. 즉 주변 여건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끌어내기에 유리하지 않다.
거기에 더해 남북 및 미북 정상회담 이후 지금까지 북한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나 비핵화 일정에 관해 어떠한 약속도 내놓지 않으면서 버티는 중이고 미군 유해송환, 종전선언 논의, 남북대화 등이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북핵 폐기’라는 알맹이가 빠진 가운데 북한이 자신들이 원했던 결실들을 거둬가는 형국이다. 북한은 평화공세를 통해 미국의 군사행동 가능성이라는 소낙비를 피하면서 외교적 위상을 얻었고 비핵화의 대상이 북한이 아닌 한반도라는 것을 공식화함으로써 미 핵우산 제거와 한미동맹의 유명무실화를 요구할 명분을 얻었으며 연합훈련 중단이라는 짭짤한 성과도 챙겼다. 일반 국민은 남북화해 분위기에 열광할 수 있지만 전문가의 눈에는 본말(本末)이 전도된 상태가 기약 없이 지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북한이 대륙간탄도탄(ICBM) 등 미국을 직접 위협하는 핵 능력만을 포기하는 선에서 미국과 타협하면서 ‘체제보장’의 명분으로 제재 해제, 경제 지원, 한미동맹 약화, 핵우산 제거 등을 얻으려 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즉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유엔에서 열릴지도 모르는 남북미 정상회담이 한반도의 냉전 종식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북한이 너무 늦지 않게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과 일정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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