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현재 인도네시아는 주로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발리 지역에만 힌두교가 남아 있지만 한때는 불교 국가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유적지가 바로 보로부두르 대탑이다.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이 탑은 규모도 크거니와 새겨진 부조가 화엄사상을 표현하고 있어 더욱 희귀한 것이다. ‘전 우주가 내 집이요, 온 생명이 내 가족’이라는 위대한 화엄사상은 이 시대에 다시 살려야 한다.
탑 아래에서 동참자들과 함께 ‘화엄경’의 축소판인 ‘화엄경 약찬게’를 봉송하고 ‘화엄성중’을 정근하며 줄지어 올랐다. 한 칸 한 칸 오를수록 기운은 더욱 좋게 느껴졌으며 많은 관광객과 참배객들의 시선을 받으며 맨 꼭대기까지 탑돌이를 거행했다. ‘화엄경’의 삼신불과 상계·중계·하계의 선신들이 다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었는데 ‘약찬게’를 봉송하고 ‘화엄성중’을 정근하니 무척 반가웠던 것이 아닐까. 붓다의 깨달음을 가장 장대하고 자세하게 표현한 경전이 ‘화엄경’이다.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은 원숭이를 손쉽게 잡는다고 한다. 발 빠르고 나무도 잘 타며 민첩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가 왜 그리 쉽게 잡힐까. 한 마디로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숭이를 잡기 위해서는 큰 나무나 단단한 흙더미에 원숭이 손이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넣는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서 지켜보면 ‘상황 끝’이다.
원숭이는 조심스레 구멍으로 다가와 손을 집어넣어 음식을 꺼내려고 한다. 하지만 음식을 손에 꽉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주먹이 구멍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맨손은 쉽게 들어가지만 주먹을 쥔 손은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사람이 다가가도 여전히 손을 움켜쥐고 있으니 ‘꽥꽥’ 소리만 지르면서 도망가지도 못한다. 먹이를 놓기만 하면 쉽게 도망갈 수 있는데….
끝내 음식을 포기하지 못한 원숭이는 손쉽게 포획돼 사람들의 음식이 되거나 팔려나간다. 천만다행으로 살아서 애완동물로 팔려가더라도 결코 자유는 없다. 모든 것을 주인 뜻에 맡겨야 한다. 먹으라면 먹고 돌라면 돌고 자라면 자야 하니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다.
사실 이런 점은 사람과도 많이 닮아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복을 닦고 도를 닦으라고 권장해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는 핑계를 대기 일쑤다. 특히 먹고사는 문제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현재 가진 것 또는 갖고자 하는 것을 일부라도, 혹은 일시적으로라도 포기하지 못하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음식을 움켜쥔 원숭이가 그 자리에서 도망가지 못하고 맴맴 돌다가 사람들에게 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로병사의 고통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붓다는 포기의 달인이다.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세 가지를 포기했기에 위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첫째는 쾌락을 포기했다. 태자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곧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자리를 포기하고 출가했다. 둘째로는 선정을 포기했다. 출가 초기 무소유처 선정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닌 경지) 선정을 배웠지만 궁극적으로 늙고 죽음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과감하게 떠났다. 셋째로는 고행을 포기했다. 싯다르타는 호흡을 멈추는 고행, 음식을 줄이거나 끊는 고행 등 극심한 고행을 6년 동안이나 지속했지만 결국 고행이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쾌락과 선정, 그리고 고행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강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받고 기운을 차린다. 그는 마침내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보리수 밑에 풀을 깔고 앉아 늙고 죽음의 원인을 사유하기 시작했다.
“늙고 죽음은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남은 생존에 대한 열망에서 온다. 생존 열망은 무엇이든 내 것으로 취하려 함에서 비롯된다. 내 것으로 취함은 애착 때문인데 애착은 좋은 느낌에서 온다. 이러한 느낌은 접촉으로부터 생겨난다. 접촉의 근원은 육근(六根)이다. 육근은 물질과 마음에서 분화된 것이다. 물질과 마음은 나름 생각(識)에서 생겨난다. 나름 생각은 의도적 행위의 결과이다. 의도적 행위는 무아(無我)에 대한 밝지 못함(無明)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무아에 대해 밝아지면 결국 늙고 죽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싯다르타는 쾌락과 선정, 그리고 고행을 과감히 포기하고 늙고 죽음의 원인에 대한 사유로 해탈이라는 대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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