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이 영원히 막을 내렸다. 제1회 대종상 여우주연상부터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여배우로서 최고의 상을 휩쓸었던 은막의 스타 최은희가 연출하고 출연한 한 편의 생애다. 사랑은 뜨거웠고 영화계에 남긴 공로도 굵직했으나 현대사의 모진 풍파에 번번이 휩쓸릴 만큼 굴곡진 삶이었다.
원로 배우 최은희가 16일 낮 서울 화곡동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연극 무대를 누비던 그는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진출했고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을 찍으며 영화계의 신예로 떠올랐다. 서구적이고 개성 있는 미모와 연기력으로 주목받은 그는 김지미·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를 풍미한 원조 트로이카로 꼽혔다.
신상옥 감독과의 러브스토리는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이었다.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며 신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고인은 1954년 결혼했고 신 감독과 함께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고인은 신 감독과 찍은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1976년까지 130여 편에 출연하며 은막의 스타로 화려하게 부상했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주최 제1회 국산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상록수’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아세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고인은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 감독이기도 했다.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했고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한 ‘민며느리’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신 감독과 이혼한 최씨는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고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재회했다. 이후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이중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기록돼있다.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신 감독과 최 씨는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했고 이후 10여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199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고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한 것은 2006년 4월 11일 신 감독을 먼저 떠나보낸 뒤였다. 고인은 신장질환으로 임종 직전까지 일주일에 세 차례 신장투석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 거주)·명희·승리 씨 등 2남 2녀가 있다.
당초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사에 큰 획을 그은 고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한국영화인총연합회장을 검토했으나 “조용하고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러달라”는 고인의 유언을 따르기로 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9일 오전, 장지는 안성천주교공원묘지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