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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600살 맞는 강진의 풍류]'천년비색' 청자의 땅...'모란의 시인' 영랑의 고향

360년전 병영성 거슬러 올라가면

네덜란드 상인 하멜의 흔적 고스란히

고려시대부터 가마터 수백곳 산재

국보급 80% 생산돼 자기의 본산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의 생가.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강진(康津)이 배출한 시인 김영랑은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는 날을 ‘모란이 피는 날’로 빗대어 조국 광복을 염원했다고 우리는 배웠다. 하지만 시는 시 자체로 받아들여야 할 뿐 평론가들이 시를 요리하고 학생들의 머릿속에 주입할 권한은 없다. 그러나 시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지금까지 이 시는 그렇게 가르쳐졌다. 영랑은 이 시가 후대 교과서에 실릴 것을 예측 못했는지 자신이 써놓고도 마음에 안 들어 했다. 되레 지인들이 탁월한 시어(詩語)를 칭찬하며 발표에 앞장섰을 정도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시는 조국 해방을 염원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영랑이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하기 직전까지 결혼을 약속했던 여성이 있었는데 그 여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다.

이런 상념 속에 강진을 찾아 영랑생가를 한참이나 서성였다. 그러나 도무지 시인의 속내는 알 수 없었다. 영랑은 500석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청년회에서 영어를 수학한 후 휘문의숙에 입학, 지난 1919년 만세운동 후 그해 4월 귀향했다.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기획하다 검거됐던 그의 이력과 부인과 사별·재혼 등 파란 많은 삶을 살았던 감수성이 어느 쪽으로 더 근접했을지는 생가와 시문학파기념관도 둘러본 후 개인의 생각으로 판단할 일이다.

강진은 고려시대부터 수백 곳의 요(窯)가 산재했던 자기의 본산이다. 강진군은 23호 가마터 부근에 청자박물관과 판매점 등을 조성해 놓았다.


올해는 강진이 생겨난 지 600년째 되는 해다. 600년 전 세상에 없던 강진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1417년(조선 태종 17년) 도강현과 탐진현에서 한 자씩을 따와 강진군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그해에는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는 전라병영성도 축성했다. 따라서 올해는 강진과 전라병영성이 함께 600살을 맞는 해다.

오랜만에 찾은 강진은 때마침 축제의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전라병영성 일대에서는 젊은 여자 모델들이 패션쇼를 위해 워킹 연습을 했고 관람객 전시를 위해 탱크와 155㎜포를 끌고 온 병사들은 그들의 몸짓을 바라보았다. 젊은 처자들을 바라보는 병사들을 눈길을 따라 360여년 전의 병영성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1653년 헨드릭 하멜이 탄 네덜란드 무역선 스페르베르호는 인도네시아에서 대만을 거쳐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제주 인근 해역에서 풍랑을 만나 난파했다. 가까스로 제주 해변에 도달한 64명은 제주와 강진·한양 등을 전전했다.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서양인들의 화포 제조기술이 절실했고 이들의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조선 체류 13년 중 10개월은 제주, 7년간은 강진에 머물렀고 나머지 기간은 한양 등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난파한 무역선의 서기 하멜은 그 와중에도 직분에 충실했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조선에 머물던 기간 월급을 받기 위해 겪었던 일들을 낱낱이 기록했다. 13년 만에 귀국한 그는 표류기로 떼돈을 벌었고 360년 후 그가 머물던 강진에는 그를 기리는 전시관까지 생겼다.

강진은 제주에 표류했던 하멜이 머물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360년 후 그가 머물던 강진에는 그를 기리는 전시관까지 생겼다.


이것저것 볼 것 많은 와중에도 강진의 아이콘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첫손가락에 드는 것이 고려청자다. 강진은 고려시대부터 수백 곳의 요(窯)가 산재했던 자기의 본산이다. 강진군은 23호 가마터 부근에 청자박물관과 판매점 등을 조성해 놓았다. 박물관 1층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청자를 전시하고 있다. 강진은 2007년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도자기 운반선이 발견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선실 안에서 배와 함께 수장된 2만여점의 도자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함께 있던 목간(木簡·종이가 발명되기 전 기록에 사용되던 나무조각)에는 이 물건들이 지금의 강진인 탐진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실제로도 강진군 대구면 일대는 고려청자의 주생산지로 9~14세기에 걸쳐 500년 동안 청자를 생산하던 단지였다. 우리나라 국보급 청자의 80% 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된 것만 보더라도 그 당시 이곳의 위세가 어땠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고려청자박물관은 청자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수집·조사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관요와 26개 민간요의 청자를 판매하고 있는 판매점도 있다.

한편 강진군은 올해가 군(郡)과 병영성 탄생 600주년인 동시에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 ‘경세유표’를 저술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고 천년 비색을 자랑하는 고려청자 재현사업 성공 4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라는 것을 기려 2017년을 ‘강진 방문의 해’로 정하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문의는 강진군문화관광재단, (061)434-7999.

/글·사진(강진)=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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