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퀄컴이 독점적 시장지위를 누리게 한 사업 모델을 부당한 거래로 간주하고 퀄컴이 보유한 표준필수특허(SEP)를 차별 없이 칩세트제조사 등에 제공하게 한 시정명령도 함께 내렸다. 퀄컴의 사업 모델 자체를 바꾸라고 요구한 것은 전 세계 최초로 퀄컴 입장에서는 과징금보다 더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는 칩세트·특허권 시장에서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한 퀄컴 인코포레이티드, 퀄컴 테크놀로지 인코포레이티드, 퀄컴 CDMA 테크놀로지 아시아퍼시픽 PTE LTD 등 3개사(이하 퀄컴)에 과징금 1조300억원과 함께 시정명령을 내렸다고 28일 밝혔다.
미국에 있는 퀄컴의 본사 퀄컴 인코포레이티드는 특허권 사업을, 나머지 2개사는 이동통신용 모뎀칩세트 사업을 하고 있다.
이번 과징금은 사상 최대 규모다. 지금까지 최대 과징금은 2010년 4월 판매가격을 담합한 6개 액화석유가스(LPG) 공급회사에 부과한 6,689억원이었다.
칩세트제조사이자 특허권사업자인 퀄컴은 휴대전화 생산에 필수적인 여러 개의 이동통신 표준필수특허(SEP)를 보유하고 있다.
퀄컴은 특허이용을 원하는 사업자에게 SEP을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차별 없이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국제표준화기구 확약(FRAND)을 선언하고 SEP 보유자 지위를 인정받았다. SEP는 다른 기술로 대체할 수 없으므로 SEP을 보유한 것 자체만으로 독점적 지위를 누리게 된다.
하지만 퀄컴은 삼성·인텔 등 칩세트사가 SEP 계약 체결을 요구하면 이를 거부하거나 판매처를 퀄컴 고객인 휴대폰 제조·판매사로 제한하는 등 실질적인 특허권 사용을 방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퀄컴은 이렇게 강화된 칩세트 시장지배력을 지렛대로 삼아 칩세트 공급 중단 위협을 가하며 휴대전화사와 특허권 계약을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체결했다.
퀄컴은 휴대전화사에 자사의 칩세트와 관련된 특허권을 유료로 제공한 대가로 휴대전화 제조사가 보유한 이동통신 관련 필수특허를 무료로 끌어모았다.
휴대전화 제조사들은 휴대전화에 꼭 필요한 퀄컴의 칩세트를 공급받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이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개발한 특허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특허권이 퀄컴에 집중되면서 타사의 칩세트뿐만 아니라 타사 칩세트를 사용한 휴대전화까지 퀄컴의 특허권 공격 위험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결국, 휴대전화 제조사들은 점점 퀄컴 칩세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마땅한 공급처를 찾지 못한 칩세트제조사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아야 했다.
실제로 2008년 도이치뱅크가 선정한 세계 주요 11개 칩세트사 중 현재 9개사가 퇴출된 상태다.
공정위는 과징금과 함께 칩세트사가 요청하면 퀄컴이 부당한 제약 조건을 요구하지 않고 특허 라이선스 계약에 성실히 임하도록 하는 시정명령도 내렸다.
또 휴대전화제조사 등에 칩세트 공급을 볼모로 특허권 계약을 강요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관련 계약 조항을 수정하거나 삭제할 것을 명령했다.
아울러 휴대전화제조사와 특허권 계약을 할 때 특허 종류 구분 없이 포괄적으로 계약 체결을 강제하는 행위, 특허가치를 산정 절차 없이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 등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휴대전화제조사가 요청하면 기존 특허권 계약도 재협상할 수 있도록 하는 의무도 부여했다.
이번 시정명령을 통해 퀄컴의 ‘갑질’이 사라지고 특허권 협상도 정상화되면 이른바 ‘퀄컴세’ 등 국내 칩세트·제조사의 특허료 부담이 낮아져 휴대전화 가격도 인하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 진다. 공정위 결정이 확정되어 퀄컴과 재계약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회사는 국내 뿐 아니라 미국·중국·대만까지 해당한다. 휴대폰을 제조하거나 판매하는 삼성과 LG, 팬택, 애플과 칩셋을 제조·납품하는 인텔·미디어텍(대만) 등이다.
또 특허권을 퀄컴에 사실상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던 관행도 사라지면 휴대전화제조사들의 연구개발 투자도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다만 퀄컴이 공정위의 결정에 반발해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실제 결론이 날때까지 수년이 걸릴 수 있다. 공정위는 2009년 퀄컴이 휴대전화 회사와 라이선스 계약 과정에서 리베이트 제공과 끼워 팔기한 혐의로 과징금을 부과했지만 퀄컴의 소송을 제기해 현재도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공정위는 2014년 8월 퀄컴에 대한 조사에 착수, 지난해 11월 조사를 마치고 심사보고서를 전원회의에 상정했다.
퀄컴은 지난 11월 공정위에 자진시정을 조건으로 제재 없이 사건을 종결하는 동의의결을 신청했지만, 공정위는 혐의의 중대성, 소비자 보호 등을 이유로 이를 기각했다.
공정위 심사관과 퀄컴 측이 함께 참여하는 전원회의는 지난 7월부터 총 7차례 걸쳐 열렸으며 삼성전자, LG전자, 애플, 인텔, 화웨이, 에릭슨 등 세계 각국의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이 대거 심의에 참여했다.
/임세원기자 wh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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