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가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누군가와의 대화 내용을 기계에 담는 녹취는 기자나 정보·사법기관 종사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최근 일반인 사이에서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특히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최순실씨 육성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녹취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 22일 서울 용산전자상가에서 만난 소형 전자제품 판매업자 이모(41)씨는 “하루에 많이 팔려야 5대 정도였던 녹취 장비가 요즘 10대 이상 팔리고 있다”며 “특이한 녹취 장비를 구하기 위해 상가 일대를 누비는 고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고 전했다.
스마트폰에 음성녹음 기능이 탑재돼 있는데 굳이 녹취 장비를 따로 찾는 이유는 뭘까. 용산상가에서 녹취 장비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강모(46)씨는 “요즘 녹취에 대한 경계가 심해져 스마트폰을 사용하면 상대방이 금방 알아채기 때문에 스마트폰은 전화통화 녹음용으로 주로 쓰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요즘 나오는 녹취 장비는 과거 첩보영화에서나 나오던 볼펜 모양이나 단추형 녹음기 등 상대방 모르게 위장할 수 있는 장비들이 많다”면서 “가격도 5만~20만원으로 예전보다 많이 저렴해졌다”고 전했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전화통화 내용 녹취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나타나듯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KT 자회사가 출시한 녹취 애플리케이션의 다운로드 건수는 2,600만건에 이른다. SK텔레콤이 내놓은 앱의 다운로드 건수도 1,000만건을 돌파했다. 모든 통화를 자동녹음할 수도 있고 미리 지정한 전화번호로 걸려온 통화만 녹음하도록 선택할 수도 있다. 다만 애플의 아이폰은 통화 녹음을 금지한 미국 법률에 따라 국내에 출시한 제품도 녹취 기능을 원천차단해 사용할 수 없다.
본인이 참여하는 통화는 상대방의 동의를 받지 않고 녹음해도 정보통신망법이나 통신비밀보호법 등에 저촉되지 않는다. 하지만 통화 내용을 제3자에게 유출하면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이 발생할 수 있다.
일반인은 법원 제출을 염두에 두고 녹취를 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법원은 협박이나 불법적인 지시 등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녹취를 채택하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도 녹취를 권한다.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법적 증거인데다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직장 상사나 직장 내 따돌림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녹취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정진용 노무법인 동인 노무사는 “밤늦게 전화해 욕설 또는 인신모독 발언을 하는 등 직장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상담을 받으러 오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며 “당사자 간 대화 녹취는 대부분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녹취가 일상화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사회현상 전문가들은 불신 풍조와 법 만능주의가 깔려 있다고 분석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갈등이 발생했을 때 대화와 타협으로 풀었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법적 절차로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아져 법적 증거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녹취가 활용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류여해 수원대 법학과 교수는 “법원 판결이나 다양한 사례에서 녹취가 자신에게 유리한 고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학습효과가 커지고 있다”며 “이러한 현상의 밑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다”고 말했다. /김정욱·이두형기자 myk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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