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조사와 대통령 탄핵안 표결 등 숨 가쁜 일정이 흘러가고 있지만 온 나라의 시계는 멈춰선 지 오래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면서 국가 이미지조차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로 바뀐 지 오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사과에 나선 지난 10월25일 이래 대한민국의 시계는 7주째 멈춰 섰다.
지난주 광장에 모인 232만 촛불의 힘은 오랜 기간 쌓이고 쌓인 ‘불통’에 대한 국민의 분노이자 변화의 바람이다. 하지만 지난 40여일 동안 국가적 담론의 향배는 대한민국의 근간을 거머쥔 권력 집단의 비리에서 특정 개인의 비리 수준으로 격하되는 듯한 모습이다. 실체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는 하지만 논해야 할 것을 논하는 대신 신변잡기에 우선해 본질을 흐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아마도 수십 년간 이 나라 권력의 핵심부를 좌지우지해왔을 수도 있음을 최초로 드러낸 사이비 종교의 실체는 국정농단의 주범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개인 비리에 묻혀 존재감을 잃었다. 사이비 교주 최태민 일가의 자금 조사도 신변잡기 일변으로 흘러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사태의 시작인 태블릿PC에 대한 실체 조명 역시 ‘문화 실세’에 대한 폭로전과 측근 비리로 기회를 잃었다.
대신 현 정권 들어 일어난 온갖 불통은 한 아주머니 때문으로 치부됐다. 또 모든 문제가 태반주사인지 올림머리인지 비아그라인지에 심취(?)한 대통령 개인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부동산 급등에 대한 국민의 신음도 부익부 빈익빈으로 고착화한 교육시스템도 분명 대통령 한 명 때문은 결코 아닐 것이다. 현 정권 최대의 치적으로 평가받는 ‘통일 대박론’도 갑남을녀의 아이디어로 비웃음을 사고 있다. 본래 권력형 비리란 특정 개인만의 문제일 수 없건만 사건의 실체적 규명보다 희화화된 폭로전이 더 우선시되는 느낌이다.
이러한 감성적 폭로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실체 규명을 우선순위에 놓지 않아 차제에 중차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가능성도 옅어진다는 데 있다. 진실의 실체가 아무리 거대하다고 해도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기인한 정보는 끝까지 끌고 갈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뀐다고 해 권력 집단 자체가 바뀔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국민 위에 서서 논해야 할 것을 논하지 않고 본질을 흐리는 배후의 담론들은 사태 전이나 후나 그리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대통령보다 더 바뀌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권력 집단의 오만함이다.
국민의 염원대로 나라를 바꾸려면, 촛불을 켜고 일어난 의의를 상실감으로 끝내지 않으려면, 국민 각자가 더욱 깨어나 철학 및 사고의 ‘격(格)’과 건전한 비판정신을 갖추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한 나라의 국격이란 지배 집단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만든다는 점을 명심하지 않는다면 인물이 바뀌어도 오늘은 또 반복될 뿐 진전은 없을 것이다. heew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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