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겸 옻칠 공예가 허명욱(50)은 물푸레나무에 수십 번 옻칠을 먹여 187개의 함(函)을 만들었다. 전부 모아놓고 완성 기념사진(?)만 찍은 다음 일주일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이를 나눠줬다. 나이·성별·직업 불문하고 건네면서도 정작 함의 용도는 말하지 않았고 “6개월이 지나면 돌려달라”고 만 했다.
그렇게 되돌아온 함은 11줄로 17개씩 쌓여 ‘시간을 담은 노란통’이라는 설치작품이 됐다. 보석함·과자그릇·화분·붓통 등 사람마다 쓰임도 제각각이었다고 한다. 똑같이 주어지지만 누구도 동일하게 사용하지 않는, 시간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맞은 편에도 같은 구조의 설치작품이 놓였다. 노란 통이 사용하던 헌 것이라면 이쪽은 새것이다. 다만 용인의 작업실 정원에 놓여 햇빛을 쬐고 바람을 맞은 그릇들이다. 앞의 것이 사람의 손때 묻은 흔적들이라면 흰색·녹색·빨간색 함으로 이뤄진 설치작품은 자연의 손때로 빚은 작품이다.
옻칠을 활용해 회화·설치·가구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허명욱의 개인전 ‘칠(漆)하다’가 다음 달 4일까지 서울 종로구 북촌로 갤러리 아라리오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시간의 흔적을 기록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제 색을 분명히 드러내는 재료를 찾아낸 것이 바로 옻이다.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옻칠 작업에 천착했다. 옻 추출액에 안료를 섞어 칠하고 또 칠하기를 30~40번은 기본이고 80번 이상 반복한다. 눈에 보이는 색 아래에 수십 겹의 다른 색들이 숨어있는 셈이다. 얇게 편 순금박을 붙여 만든 평면작품과 옻칠 가구 등 탐나는 작품 15점이 선보였다. (02)541-5701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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