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른 체한다면 한 나라 군주로서 말이 되겠는가? 회화란 오해받지 않는 문화를 통하여 잘못된 점을 풍자하고 그 의미까지 전달할 수 있는 일이기에 가히 사회 혁명이라 불러도 되지 않겠느냐. 굳이 창을 앞세워 시위하지 않아도, 방패를 내세워 방어하지 않아도 평화적 대항마가 될 수 있어 과인에게는 큰 무기가 될 것이다.” (본문 158쪽·1783~1786년의 기록 중)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1752~1800)는 도화서 화원 김홍도(1745~생몰년 미상)를 불러다 앉히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무렵 김홍도는 여행 중 자주 볼 수 있는 거리 풍경을 담아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를 그리곤 했다. 마침 세상사가 궁금하던 정조는 이 화첩을 가져오라 하여 유심히 살펴본 터였다. 그간 봤던 풍속화가 중국화풍을 따르는 것과 달리 김홍도의 그림은 이 땅의 산천을 그리고 생생한 우리네 모습을 보여줬다. 정조는 김홍도를 다시 불러들이고는 “ 백성의 삶을 그려 왕의 눈과 귀 역할을 하라”고 명했다.
‘성군 정치’를 꿈꾸며 개혁을 추구하던 정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민심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그런 정조에게 김홍도는 “왕명을 받아 백성의 삶을 밀착 취재, 보도하는 기자”였으며 풍속화는 “정조의 민생보고서”였다고 정의한다. 방송사에 근무하면서 역사 저술가로도 활동하는 저자는 정조의 총애를 받은 국왕 직속 화원이었음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단 세 줄의 기록만이 전하는 김홍도의 행적을 여러 문헌을 기반해 재구성했다.
역사드라마의 대본처럼 책은 팩션이다. 저자의 상상력이 가미된 대화체로 구성돼 읽기 쉬운 반면 역사와 허구가 혼재되는 낯설음이 있다. 한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김홍도가 그렸다고는 하나 그 원본이 전하지 않는 ‘징각아집도’로 추정한 그림을 공개했다. 이 그림을 김홍도의 것이라고 단언하기에는 학문적 연구가 요원하다는 사실엔 저자도 동의했다. 2만원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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