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후 사건 축소에만 급급… 美·佛등 지원 제의도 묵살<br>정부 기관과 '검은 커넥션'… 허술한 관리 감독도 禍불러<br>피해보상액 매출 2배 넘어… 30년만에 다시 국유화 기로
도쿄전력 도쿄지점은 지난달 22일 도쿄 중심부인 23구에 위치한 사원용 기숙사의 명패에서 회사 이름을 지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본사의 지시에 각 기숙사는 부랴부랴 검은 테이프를 붙여서 명패에 새겨진 회사 이름을 가리거나 서둘러 새 명패로 바꿔 달았다. 후쿠시마(福島) 원전의 방사능 유출 사고 이후 '공공의 적'으로 낙인 찍힌 도쿄전력이 "직원들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내린 조치였다.
안정된 고소득 직장이라는 부러움을 사던 도쿄전력의 직원들이 온 국민의 항의와 익명의 협박에 시달리게 된 현실은 일본을 대표하는 인프라 기업에서 전세계를 위협하는 최악의 방사능 유출사고의 '주범'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도쿄전력의 추락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전 사태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수습불가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도쿄전력은 창사 60년을 맞이한 지금 회사 설립 이래 최대의 위기와 맞닥뜨리고 있다.
대지진과 거대 쓰나미라는 자연재해가 인재(人災)로 바뀌면서 수습불가의 국면으로 접어든 데는 일본 정부의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늑장대응 못지 않게 도쿄전력의 잘못된 대처방법이 큰 원인이 됐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과거 도쿄전력이 주축이 돼서 이뤄낸 일본의 원전 신화가 애당초 '조작'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낳을 정도로 도쿄전력이라는 거대 조직의 심각함이 속속 드러나며 일본인 뿐 아니라 전세계에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고 있다.
원전사고 직후 가장 문제시된 것은 사건을 축소시키고 정보를 제대로 공유하지 않으려는 도쿄전력의 '은폐주의'와 사고대처 과정에서 드러난 안일함이었다. 도쿄전력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초기대응 기회를 놓쳤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드러났다. 사고 초기 미국 정부가 '원전 완전 폐기'를 전제로 원전 냉각수 시스템 복구를 위한 기술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도쿄전력에 제안했지만, 회사측이 원전을 폐기할 경우 새로 부담해야 할 신규 원전 건설비용 5조엔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프랑스전력공사(EDF)가 원전 작업용 무인로봇을 포함한 특수장비 지원을 제의했지만 도쿄전력은 이를 묵살했다.
심지어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도쿄전력을 이끌어야 할 시미즈 마사타카 사장은 사고 이후 건강 악화를 이유로 잠적하더니 지난달 30일 열린 공식 사과 기자회견 자리에도 입원을 이유로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에 대해 '관료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본의 실상'이라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전세계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집중시킨 도쿄전력의 이 같은 일련의 행태의 근저에는 깊이 뿌리내린 '은폐 주의'와 일본 정부와의 오랜 유착관계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시사주간지 아에라는 도쿄전력이 경제산업성 장관을 고문으로 영입하는 등 도쿄전력과 정부 부처, 감시기관인 원자력안전보안원 사이에 '더러운 삼각형'이 형성되면서 정부가 도쿄전력의 수익을 보장해 왔다고 지적했다. 일본열도를 10개 전력사가 나눠먹는 지역 독점체제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수도권을 관할하는 도쿄전력은 경쟁할 필요도 없었고, 해외원전 수주 역시 정부가 물어다 주면 받아먹기만 하면 됐다는 것이다.
아울러 기간산업인 전력산업을 민영화시킨 것이 이번 원전사태를 초래한 주요인이라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들은 도쿄전력이 대지진 발생 가능성에 대한 경고와 노후설비에 대한 지적 등을 무시한 것은 물론, 허술한 점검으로 사실상 화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도쿄전력이 원전 운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안전성 강화 및 위기대응을 소홀히 한 것은 운영 수익을 높이고 비용절감에 주력하는 민간기업으로서의 한계 때문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결국 민영화 30년 만에 최악의 원전 사고를 일으킨 도쿄전력은 다시 국유화될 기로에 놓이게 됐다. 원전 사태가 심화하면서 도쿄전력이 농수산물과 첨단장비 피해보상액, 주변 지역 대피를 위한 보상, 원자로 철거비용, 화력발전소 복구비용, 자금조달을 위한 금리부담 등을 위해 책임져야 할 피해보상액은 적어도 매출액 5조 엔의 두 배를 넘는 11조엔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일개 민간기업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다.
시장도 일찌감치 등을 돌렸다. 주가는 사고 당일 이후 80% 이상 급락했다. 사고 이후 신용등급도 연일 급락해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도쿄전력의 신용등급을 'Aa2'에서 'Baa1'로 무려 5단계나 낮췄다.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AA-'에서 'BBB+'로 끌어내렸다. 도쿄전력 회사채의 신용부도스왑(CDS)도 급등했다. 일본 정부의 대규모 자금투입 없이 도쿄전력이 이번 사태를 수습하기는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도쿄전력의 국유화 여부가 아니다. 도쿄전력이 초래한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의 은폐 체질을 만천하에 드러냄으로써 일본에 대한 신뢰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일본 언론들은 도쿄전력의 보상이 본격화되고 일본 정부가 보상 문제에 직접 나서는 시점이 되면 일본의 국가신용도도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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