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에 ‘약(藥)’으로만 알았던 엔화 강세가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메가톤급 변수와 맞물려 ‘독(毒)’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통상 적절한 엔고(高)는 일본과 수출시장에서 맞붙는 국내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여 경상수지를 개선시키는 등 긍정적인 영향이 큰 것으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이번 엔고는 사정이 다르다. 전세계 경기침체로 수출증대 효과는 상쇄되는 반면 수입단가 상승과 엔화대출 상환부담 증대, 물가압력 등 부정적인 효과가 부각되고 있다. 게다가 이 같은 부(負)의 효과는 주로 체질이 약한 중소기업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어 우리 경제에 적잖은 부담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경제 침체로 ‘엔고 수혜’ 상쇄 우려=KOTRA는 최근의 엔고 현상이 자동차ㆍ가전 등 세계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는 제품 수출에는 긍정적이지만 대일 무역적자는 갈수록 심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부품소재 수입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로서는 환율요인에 따른 대일 수출 증대 못지않게 일본으로부터의 수입단가 부담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엔고가 본격화된 지난 9월 우리나라의 대일 수출이 전년동월비 17% 늘어난 23억달러를 기록한 반면 수입은 27.3% 증가해 53억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대일 교역의 60%가량이 중간재 형태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극심한 엔고는 일본 부품소재를 조달해야 하는 국내 기업에 막대한 비용 부담 요인이다. 세계 수출시장에서의 엔고 ‘수혜’는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일본팀장은 “지금은 통상적인 엔화가치 상승과는 사정이 다르다”며 “일반적으로 엔고는 우리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증대시킬 것으로 인식되지만 세계경제 침체에 따른 시장규모 자체의 축소를 상대가격 변화만으로 커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부분적인 수출증대와 여행수지 개선 효과를 제외하면 이번 엔고에서는 마이너스 효과만 우려된다는 의견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고조되고 있다. ◇중소기업 ‘죽을 맛’…일부 대기업만 미소짓나=자산시장에서도 엔고의 파급효과는 부정적이다. 저리의 일본자금을 빌려 신흥국에 투자됐던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안전하고 상대적 가치가 높은 엔화로 역류하기 시작하면서 금융시장 불안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은 엔화 가치를 더욱 끌어올려 국내 외국인 자금 이탈과 자산가치 하락을 야기하고, 이는 원화가치 추가 하락과 엔화 상승을 야기해 더 많은 자금을 이탈시키는 악순환을 일으킨다. 아울러 그동안 저금리를 좇아 일본자금을 대출받아 썼던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의 상환부담이 급증해 중소기업의 자금사정도 급격히 나빠졌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엔고 현상은 엔화대출기업의 차입부담과 그동안 국내 자산에 투자됐던 엔화자금 역류에 따른 자산가격 하락이라는 이중부담을 안겨주게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같은 부담은 주로 중소기업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자금수요 때문에 엔화대출 비중이 높은데다 내수시장에 의존하는 중소기업의 경우 엔고 혜택은 없이 이중ㆍ삼중의 부담만 떠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대기업은 전자ㆍ자동차 등 수출산업에서 확고한 입지가 있는데다 환리스크 관리능력을 갖추고 있어 엔고 수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세계경제 위축으로 엔고 효과를 정확히 분석하기는 어렵지만 해외 수출이 탄탄한 기업은 그래도 플러스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며 “다만 일본 부품을 수입해 수출보다 내수용 제품을 만드는 기업의 경우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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