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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나 대가가 너무 컸다. 일행이 타고 온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한 명은 바퀴를 교체하러 읍내로 나갔다. 비경이 은둔하고 있는 왕피천 제2탐방로의 시작점인 굴구지마을까지 들어오는 길은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폭이었다. 그런 길에서 마주 오는 차를 만났다. 우리는 차가 두 대이니 상대방이 양보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리막길을 내려온 그 차가 후진으로 오르막을 올라가 양보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우리 차 두 대가 교행이 가능한 곳까지 후진하기로 했다. 이 와중에 오른쪽 벽에서 튀어나온 뾰족한 돌부리에 바퀴가 찢긴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견딜 만했다. 용소를 목전에 두고 왕피천을 건너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신발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물이 고의춤까지 잠겼다. 물을 건너고 난 다음에야 바지주머니 속에 넣어 둔 휴대폰의 안부가 궁금했다. 젖은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내 보았더니 휴대폰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후였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시간까지 잡는다면 경상북도 울진까지는 족히 다섯 시간이 넘게 걸린다. 울진·봉화·영양·청송 같은 경북 해안 및 내륙지방은 수도권에서 가장 접근이 힘든 곳들이다. 땅끝마을 해남도, 국토의 끝 마라도도 이곳들보다는 접근 수월하다. 그중에서도 태백산맥의 중간에 위치한 울진은 강원도를 경유해서 갈 수밖에 없는 곳이라 심리적인 거리감은 사뭇 더하다.
하지만 때 묻지 않은 대자연의 속살을 보고 싶다면 이곳을 찾아야 한다. 차로 다섯 시간을 걸려서, 그리고 또 두 시간 산길을 헤매서라도 이곳은 가봐야 한다.
왕피천은 동수곡삼거리에서 실둑교에 이르는 제1탐방로, 굴구지마을에서 용소를 거쳐 거북바위조망대를 돌아오는 제2탐방로, 수곡리에서 하원리까지 가는 제3탐방로로 나뉘어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그중 최고는 제2탐방로의 용소 부근이다.
제2탐방로의 위엄은 초입에서부터 느껴진다. 계곡으로 내려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탐방로 주변의 숲은 대낮에도 빛을 가릴 정도로 빽빽하다. 숲은 문명세계로부터 방문한 도시인들에게 마치 "밀림이란 이런 것"이라고 훈시라도 하는 듯하다.
개괄적인 설명을 곁들이자면 왕피천은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해 울진군 서면과 근남면을 거쳐 동해로 흘러드는 60.95㎞의 물길이다. 산과 절벽으로 둘러싸여 접근이 쉽지 않은 대표적인 오지 계곡인 왕피천은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꼽힌다. 면적은 102.84㎢로 북한산국립공원의 1.3배 규모다.
근남면 구산리 상천동에서 시작하는 제2탐방로의 트레킹 방법은 2가지다. S자로 휘어지는 계곡을 따라 모래톱과 자갈톱을 걷고 바위를 오르면서 폭 5~8m 물을 건너는 계곡 트레킹을 하거나 산자락에 조성된 생태탐방로를 걷는 것 중 한 가지를 택하면 된다.
상천동 초소를 지키고 있는 김순란 해설사는 "굴구지마을에서 상류에 있는 거북바위 조망대를 거쳐 돌아올 경우 생태탐방로를 이용하면 왕복 네 시간이 소요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하천변으로 내려가 물길을 따라 걸으면 30분 만에 용소에 도착할 수 있다. 상천동 초입에서 계곡길로 30분이면 당도하는 용소는 수심이 10m 정도로 왕피천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물길이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위험하기 때문에 계곡 트레킹을 하더라도 이 구간만은 생태탐방로로 우회하는 것이 좋다. 용소는 그 이름에 걸맞은 풍광을 자랑한다. 물길 양쪽으로 하얀 화강암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데 물길에 깎인 그 모습에 벌어진 입이 닫히지 않을 정도다.
생태탐방로는 계곡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을 따라 이어져 있다. 가파른 구간도 일부 있지만 계단이나 밧줄이 설치돼 있어 어려움 없이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탐방로만 이용할 경우 왕피천의 비경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만큼 입구인 상천동 초소에서 용소까지는 30분 정도는 하천변을 걷는 것이 좋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나 유량이 많은 날에는 탐방로 선택하기를 권한다. 용소를 지나 상류 쪽으로 계속 가기 위해서는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탐방로를 타야 한다. 탐방로 중간중간에 왕피천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용소 위쪽으로는 학소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또 다른 용의 모습이 보인다. 제일 앞의 바위는 용의 머리를 닮았고 그 뒤로 몸통에 해당되는 암벽들이 줄지어 서 있다.
김 해설사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왕피천 제2탐방로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며 "하지만 이곳에 와 본 사람들은 경치에 감탄하면서도 접근에 애를 먹어선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고 말했다.
계곡이 외진 만큼 이곳의 주인은 동식물들이다. 그중에서도 최상위 포식자는 수달이다. 김 해설사는 "겨울에 눈이 오면 얼어붙은 계곡 위로 수달들이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활보하고 다닌다"며 "수달의 개체 수가 많아진 탓인지 예전에는 지천이던 참게와 물고기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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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울진)=우현석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