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막고 귀 막고 입 막아 어두운 전깃불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미제 보리죽이나 한 그릇 먹고 꿈나라로 가면 365분의 1년은 지나간다. 독립이 된 줄 알고 바른말 하다가 공산당으로 몰리기보다는 '지당한 말씀이야'하고 요사스러운 미소를 보이면 생명은 그럭저럭 연장되겠으나 창생이 가엾지 않은가.' 1961년 2월16일자 서울경제신문 1면 '당백전'란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민주당 정권의 한미 경제협정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됐음을 질타하는 이 기사에서 서울경제의 지향점을 읽을 수 있다.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는 쓴소리를 마다 않던 서울경제가 55년의 특종들을 모았다.
한미 경제협정, 집요한 취재로 국익 기여
창간 이튿날인 1960년 8월2일자에 서울경제는 '드러난 한미 경제 밀약 내용-예산 등 공동 검토·공정환율도 실세로 인상'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1면 톱으로 실었다. 이때부터 2월 말 한미 경제협정이 타결될 때까지 서울경제는 집요하게 협정의 불공정·불평등을 물고 늘어졌다. 기사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 면을 할애해 이 협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만평을 실었다. 4면을 발행하던 시절에 이 같은 편집방향은 사회적인 주목을 받고 결국 이 협정은 초기의 불평등 조항이 빠진 채 한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맺어졌다. 대학 교수들은 '서울경제가 협상 성과의 1등 공신'이라고 치켜세웠다.
부동산 투기 속 나온 종토세 단독 보도
한국의 통화·재정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국제통화기금(IMF)이 1966년 초 통화정책을 변경하도록 권고해 받아들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적지 않은 파장이 일었다. IMF의 정책을 결정한 미국 유명 교수들이 서강대 경제경영문제연구소가 작성한 연구보고서를 그대로 참고했다는 사실이 2월6일자 특종 보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국자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교수들의 실력에 주목했다. 서강대 리포트의 주역이었던 고 남덕우 교수는 생전에 "서강학파가 자리 잡는 데는 서경 보도의 힘이 컸다"고 말하곤 했다.
IMF 정책배경 특종… 서강대 인맥 부상
1967년 1월11일자 1면에는 '개발금융회사 3월 발족'이라는 제하의 톱 기사가 나갔다. 국제금융공사 조사단의 방한 소식과 더불어 소개된 이 특종은 보름간 후속기사가 이어지며 한국의 '제2금융권'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개발금융공사는 장기신용은행 설립과 투자금융회사(단자사)와 리스·렌털 신설 등으로 이어지며 신금융기법 도입과 자금시장 활성화를 이뤘다. 유난히 금융에 강했던 1970년대 말 서울경제는 폐간 직전 모 그룹으로부터 '서울 소재 대형 단자사+α'와 바꾸자는 매수 제의를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 적도 있다.
수출 견인차 '종합무역상사 추진' 특종
'종합무역상사 설립 추진'이라는 특종(1973년 2월6일자) 기사는 재벌그룹들의 치열한 선정 경쟁으로 이어졌다. 민관합동추진위원회는 금융기관과 기업을 묶는 방안, 반관반민 합작사 설립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한 끝에 일정 자격을 갖춘 기업에 선별적으로 허가하는 방안을 채택, 1975년 첫 지정이 이뤄졌다. 서울경제가 추진 일정부터 지정까지 상세 보도한 종합무역상사는 특혜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본보기라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계열기업군을 이끄는 선단경영의 핵심이자 한국의 수출을 이룬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부총리도 동행했던 해외 특별 인터뷰
1975년 창간호에 노벨경제학상 1회 수상자인 얀 틴베르헌 교수의 인터뷰가 실렸다. 서울경제의 네덜란드 현지 인터뷰에는 특이하게도 현직 경제부총리가 자청해 동행했다. 당시 경제부총리의 남다른 향학열이 빚어낸 노벨상 수상자 인터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경제만 가능했던 이 인터뷰는 폴 새뮤얼슨, 베르틸 올린 등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와 로마클럽의 핵심인물인 로베로토 바카 교수 등 세계적 석학들과 인터뷰로 연결되며 서울경제의 가치를 더욱 빛냈다. 박병윤 기자와 석학들과의 인연은 복간 후 그가 편집국장을 맡은 시절 '세계석학 칼럼'으로 이어졌다.
부동산 투기 속 나온 종토세 단독 보도
부동산 투기가 전국을 휩쓰는 가운데 1989년 7월26일 이병완 기자가 '정부가 종합토지세 도입을 검토하고 있으며 부과 대상은 전국의 모든 토지로 삼는다'는 내용의 특종을 건졌다. 전 국토에 대한 종토세 부과는 투기의 주범인 기업들은 배제한 채 개인의 경제행위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반론에 따라 1990년 내용이 축소 시행됐다. 다만 부동산 거래의 과표 수준이 실제 가격의 10% 남짓한 시장여건 아래 서울경제가 연속된 보도와 사설을 통해 지적한 대로 토지의 과세 가격에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삼는 제도만큼은 살아남아 시행됐다.
'대소 경협 30억달러 지원' 각계 파장
1990년 10월22일 국내외에 파장을 일으킨 '대소경협 30억달러 지원'이 1면 머리기사로 나갔다. 정부가 소련과 수교한 뒤 후속조치로 30억달러를 지원한다는 기사는 이튿날 전 매체가 1면 톱으로 받아쓸 만큼 정국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국회에서는 돈을 주고 소련과 수교하는 '구걸외교론'이 나오고 미국 등에서는 한국의 북방정책 견제론이 고개를 들었다. 학계에서는 경제가 위축된 마당에 지원규모가 너무 크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대형 특종을 건진 이종재 기자는 임의동행식으로 연행하려는 정보당국을 피해 일주일간 지방 호텔을 돌며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민자당 연수원 매각 보도… 정가 회오리
1992년 정치부 유상규 기자가 여당인 민자당이 서울 송파구 가락동 정치교육원 부지를 ㈜한양에 매각한다는 기사를 19면에 보도했다. 민자당의 대권후보 경쟁이 과열되던 시점에서 나온 이 보도는 특혜대출 시비와 정치자금 수수설 등 파문으로 이어졌다. 출입처인 국회와 민자당뿐 아니라 업계와 은행까지 교차 확인해 매각금액을 맞춘 이 보도는 전 매체가 1면 톱으로 받았다.
전세계가 받은 서울경제 IMF 특종
경제가 흔들리는데도 '펀더멘털은 튼튼하다' 'IMF에 가는 일은 절대 없다'던 당국의 허장성세가 1997년 11월21일자를 통해 거짓으로 드러나고 대선으로 달궈졌던 정국의 화두는 '경제위기'로 옮겨졌다. 비밀리에 방한한 IMF 수석부총재가 국내 인사와 호텔에서 비밀협상을 벌여 최대 600억달러를 지원하기로 의견을 나눴다는 김영기·신경립 기자의 특종은 장종철 사진부 차장의 관련 사진과 함께 전 세계로 퍼졌다. 서울경제는 이듬해 한국의 위기 처방에 문제가 있다는 IMF 보고서를 이병관 기자가 보도해 외환위기의 시발에서 처방까지 특종을 올렸다.
세월호 선사 '실소유주 유병언' 첫 보도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이 경악했던 2014년 4월18일자 1면 톱으로 '세월호 선사 청해진 해운, 세모가 전신'이라는 기사가 나갔다. 세월호의 실질적 대주주가 각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유병언 목사이며 지주회사 최대주주는 유병언 전 회장의 아들들이라는 기사는 전 언론이 머리기사로 추종 보도했다. 이어 두 달 뒤인 6월20일자 1면에 사회부 서민준 기자가 '검찰의 압수수색 문건, 구원파에 샜다'는 제하의 단독기사를 내보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권홍우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