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둘러치고 매화가 새겨진 벼루ㆍ먹을 써 매화시 100수를 짓고 큰 소리로 시를 읊다 목이 마르면 매화차를 마시는 남자. 거처에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는 액자를 만들어 걸어놓고, 홍(紅)매화를 즐겨 그리느라 붉은 연지 꽃점을 많이 써 방안이 얼룩덜룩해지자 ‘강설당(絳雪堂)’이라는 이름을 지은 매화 마니아.
중국 베끼기 탈피, 줄기엔 용이 꿈틀
세로 여섯자(약 1.8m) 크기의 대작 ‘장륙매화(丈六梅花)’를 창안하고 간략하게 그리던 매화를 수만 송이가 어우러져 핀 화려한 그림으로 발전시킨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조희룡의 이야기다. 홍매화에 뛰어났던 그는 매화 줄기의 전체적 구도를 용으로 대체해 화려하고 격렬한 역동성을 부여했다. 매화가 상징하는 바도 ‘청빈속에서 살아가는 깐깐한 선비정신’에서 ‘부처의 대자대비’로 탈바꿈시켰다.
조희룡은 1789년(정조 13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조선 개국공신 조순의 15대 손이지만 잘 나가는 사대부 집안은 아니었다. 병과에 급제한 그는 장서각 사서와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을 지냈으며 중인(中人)들과 잘 어울렸다. 58세 때 헌종의 명으로 반년동안 금강산을 답사하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궁중의 문향실(聞香室) 편액을 쓸 만큼 시(詩)ㆍ서(書)는 물론 매(梅)ㆍ난(蘭)ㆍ죽(竹)ㆍ산수(山水) 등 그림에도 뛰어났다.
초반에는 서예ㆍ실학ㆍ금석학 등에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긴 추사 김정희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고, 후반에는 중국 남종 문인화 기법으로 매화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ㆍ서ㆍ화 모든 분야에서 남이 열어놓고 닦아놓은 익숙한 길을 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 노력했다. 웬만한 호사가들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추사체 글씨를 잘 썼지만 추사의 것보다 부드러워 금석기가 덜 느껴진다는 평을 받았다.
집단에 매몰되지 않는 주체적인 나를 강조하는 노장철학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안목으로 그림을 인식하고 그리고자 했다. 대표작 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 등 그의 매화도에는 중국의 화법과 정신을 답습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이 살아 움직인다.
추사의 제자였던 그는 영의정 권돈인, 추사 등이 안동 김씨의 세도에 밀려 예송(禮訟)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1851년 북청 등으로 유배갈 때 신안군 임자도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그런데 그가 만년에 쓴 자서전적 저술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등에는 스승이 중국인의 그림을 소개하는 모습 등을 소개할 뿐이다.
이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사대부인 추사가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난(蘭) 치는 법을 가르치면서 “조희룡은 내가 난 치는 솜씨를 그대로 배워 화법(畵法) 한 가지만 쓰는 폐단을 면치 못했다. 그의 가슴 속에 문자기(文字氣)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조희룡같이 하지 말라”고 한 것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추사는 제자의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그림 솜씨에 비해 떨어진다고 평가절하했지만 조희룡의 산수ㆍ매화는 추사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승 김정희와 신분ㆍ화법 차이 뚜렷
조희룡은 전문기술자 신분인 중인(中人) 시인들의 모임인 직하시사(稷下詩社)와 벽오사(碧梧社)의 동인이었으며 중인 42명의 전기를 지어 중인문화를 정리 평가했다. 당시 미천한 계층 출신의 인물 중 학문ㆍ문장ㆍ서화ㆍ의술ㆍ점술에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호산외사(壺山外史)’도 남겼는데 김홍도 등 7명의 화가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인물 묘사와 그들 상호간의 교우관계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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