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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오피스텔 건물. 10층 높이의 이 건물에는 90여가구가 살고 있다. 이 건물의 소방시설은 복도에 비치된 소화기가 전부다. 흔한 소화전도 보이지 않고 천정에 스프링클러도 설치돼 있지 않다. 지상이나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도 한 곳뿐이다.
지난 10일 화재로 128명의 사상자를 낸 의정부 대봉그린아파트와 비슷한 구조다. 만약 이 오피스텔에 비슷한 화재가 발생할 경우 거주자들은 피할 곳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이 건물이 법을 어긴 것은 아니다. 중소형 건물의 소방시설 설치 기준 자체가 느슨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A(38)씨는 "의정부 화재 소식을 듣고 건물 내 소화전이나 스프링클러 등을 찾아봤지만 설치되지 않아 놀랐다"고 말했다.
의정부 대봉그린아파트 화재 사고를 계기로 중소형 건물이 느슨한 방화(防火) 시설 설치 기준으로 대형 건물보다 화재 사고 위험에 더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초고층 빌딩 등 대형 건축물의 경우 관련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지만 중소형 건물은 규모의 차이로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시설마저 제외되는 경우가 많은 것. 이 때문에 고밀도 개발로 화재 위험이 높은 중소형 빌딩에도 보다 강화된 방화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중소형 방화벽·비상계단 제외…스프링클러·소화전도 대형 건물에만=현행 법에서 대형 건물에는 적용되지만 중소형 건물에는 면제되는 방재 시설이 적지 않다. 우선 대형 건물에는 2개 이상 설치하도록 규정된, 지상으로 이어지는 직통 계단은 층당 4가구 이상 공동주택 또는 오피스텔의 각층 바닥면적의 합이 300㎡ 이하일 경우는 한 곳만 설치해도 된다. 방화벽 역시 연면적 1,000㎡ 이상의 대규모 건축물에만 설치가 의무 적용되고 불에 강한 내부 마감재 역시 3층 이상 각 층 거실 바닥 면적 합계가 200㎡ 이상인 경우에만 의무 사항이다. 소방차가 진입할 수 있는 공간도 11층 이상 건물에만 마련해두면 된다.
소방관계법에 적시된 소방시설 설치 기준도 중소형 건물에는 관대하다. 스프링클러는 11층 이상의 건물에만 해당되며 옥내 소화전은 4층 이상 건물 중 바닥면적이 600㎡ 이상인 층에만 의무 설치하도록 돼 있다.
이경구 대한건축학회 건축연구소장은 "중소형 건물은 방재 관련한 규정에서 최소한으로 규정돼 사각지대와 다름없다"며 "강화하는 추세지만 사회적 합의를 통해 안전기준을 점차 더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소형 건물 기준 완화…결국 비용 문제 때문=중소형 건물의 규제가 느슨한 것은 이유가 있다. 화재 피해가 대형 건물보다 덜하고 대응도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이유도 크다. 실제로 문제가 된 드라이비트(외부벽면에 불에 타기 쉬운 스티로폼을 붙여 단열하는 방식) 공법은 외단열공법 중 하나로 뛰어난 단열 성능에 비해 건축비가 저렴해 사용하고 있다. 아파트의 경우 외부는 돌이나 노출 콘크리트로 시공하고 내부에 석고보드 등 단열재를 사용하는데 드라이비트 공법은 이보다 시공비를 30~40% 아낄 수 있다. 스프링클러도 마찬가지다. 10층 건물에 원룸형 도시형생활주택 200가구를 지을 때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면 총 건축비는 8억원 이상, 가구당 400만원 이상 상승하게 된다. 중견 건설사의 한 관계자는 "대형 건물에 적용되는 시설을 중소형 건물에 그대로 적용하면 비용이 크게 늘어난다"며 "건축비가 상승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최종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면 강화보다 유연한 대안 필요할 듯=국토교통부는 이번 의정부 도시형생활주택 화재 사고와 관련해 12일 "30층 이상 고층 건축물에 대하여만 불에 타지 않는 외벽 마감재료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는 현행 건축기준과 스프링클러 설치 대상기준 등에 대해 전문가 의견 청취와 국민안전처 협의 등을 거쳐 제도개선을 검토·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보다 폭넓은 수준에서의 건축법과 소방관계법 등 관련 법의 안전기준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국민들의 높아진 안전의식에 비해 현 제도는 이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설업체의 한 관계자는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과 비용 증가 정도를 종합적으로 감안해 중소형 건물에 대해서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며 "중소형도 스프링클러나 불연재를 모두 사용하도록 하기보다 외국처럼 한 층마다 사용하도록 해 확산을 막는 등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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