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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극 맡을땐 도서관에 살며 고증
배우가 연기에만 몰입할수 있게
직접 옷 입어보고 춤 추며 연구
운명 바꾼 뮤지컬
日의류브랜드 수석디자이너 시절
"나의 시간 갖자" 사표내고 英 여행
'오페라의 유령' 보고 감동 받아
"멋진 캐릭터로 만들어주세요." 한정임(사진) 디자이너는 지난해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왕용범 연출로부터 이런 부탁을 받았다. 캐릭터를 만드는 일은 본래 연출 본인의 몫인데 왕 연출은 왜 한씨에게 이런 말을 한 걸까. "무대에서 의상은 옷 이상의 의미를 가져요. 배우의 희로애락과 순간의 감정이 의상에도 나타나야 하니 캐릭터와 다를 바 없는 거죠." 명쾌한 답변 속에 뮤지컬 의상 담당자로서 한 디자이너의 철학이 담겨 있다. 뮤지컬 시장에서 소위 '잘나간다'는 작품은 한씨의 옷을 입는다. 삼총사, 살인마 잭, 모차르트!, 몬테크리스토, 엘리자벳, 레베카, 프랑켄슈타인, 태양왕…. 무대 위 커튼이 열리고 조명이 들어오면 배우가 입은 한씨의 옷은 날개가 된다. 배우의 연기를 더욱 빛나게 하고 연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캐릭터를 표현하는 직업, 수백 벌의 화려한 옷을 만들기 위해 수백 번의 손바느질로 밤을 새우는 사람. 뮤지컬 의상 디자이너 한정임을 서울 성수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한씨의 작업실 책상은 모차르트와 유럽 의상에 관련된 외국 서적으로 가득했다. 6월 재공연에 들어가는 뮤지컬 모차르트를 위한 작업 때문이다. 사실 모차르트는 지난 2010년 공연된 작품이고 그때 역시 한씨가 의상을 담당했기에 새로 옷을 추가해야 한다는 부담은 적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 넘치는 이 디자이너는 각종 자료를 다시 꺼내 기어이 일을 만들어낸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는 연출이 바뀌었다"며 "같은 메뉴라도 주방장이 바뀌면 추구하는 맛이나 조리법이 달라지게 마련이고 쓰이는 재료도 조금씩 바뀌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연출이 의도하는 그림이 다를 수 있는 만큼 의상 역시 바뀌어야 할 부분은 새로 작업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재공연에서 새로 제작할 의상은 기껏해야 3~4벌이지만 지금까지 그려놓은 스케치는 수십 장이다. "연출이 그림을 그려가는 데 있어 의상도 여러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는 거죠. 개인적으로도 많은 걸 그려보며 상상력을 부풀려 놔야 최고의 디자인을 뽑아낼 수 있어요."
◇옷은 장신구 아닌 캐릭터의 일부=디자이너 한정임의 꼼꼼함은 뮤지컬 업계에 정평이 나 있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한 땀 한 땀 손작업을 하는 세심함은 기본이다. 더블 캐스팅 배역의 경우 배우의 연기 스타일이나 체구, 동선에 맞춰 디자인을 조금씩 변형한다. 배우에게 옷이 '장신구'가 아닌 '몸의 일부'가 돼 오로지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의상 제작 회의 때는 직접 옷을 입고 춤을 추며 실루엣과 움직임을 연구하기도 한다. "큰 무대에서는 배우가 눈빛과 손짓만으로 관객에게 어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아요. 그럴 때 '의상을 이런 식으로 활용해봐요' '이때 옷을 어떻게 움직여봐요'라는 조언을 해주면 배우가 캐릭터를 설정하는 데 도움이 돼요. 의상은 배우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연기에도 집중할 수 있도록 '기능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직접 춤추고 움직여보는 건 필수랍니다."
◇원작도 극찬한 시대와 의상의 재해석=시대극을 맡을 때는 몇 날 며칠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증에 나선다. 모차르트가 초연되기 1년 전에는 일본에서 먼저 작품을 본 뒤 일본 내 고서가 많기로 유명한 도서관에 가서 며칠 동안 로코코 시대와 관련된 자료를 팠다. 고증이 끝나면 '여기에 어떻게 현대적인 것을 접목시킬까'를 고민한다. 라이선스 작품의 경우 스토리에 부합하면서도 오리지널 작품 의상의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는, 그러면서 한국만의 매력을 차별화시킬 수 있는 디자인을 생각해내느라 머리털이 빠진다. 2년 전 뮤지컬 레베카 의상을 만들 때가 그랬다. 원작의 시대적 배경은 1920년대였지만 한국 공연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바꿨다. 10년 시간을 바꾸는 게 큰 대수겠느냐마는 의상 디자이너에게 이 차이는 컸다. "1920년대는 아르데코라인이 상징적이었는데 허리라인이 아래로 내려가는 이 양식은 국내 배우들의 신체구조에는 어울리지 않았죠. 원작에서는 아르데코라인 의상이 나왔지만 우리는 30년대 들어 나타난 곡선을 활용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었어요." 한씨의 이 같은 아이디어는 오리지널 제작사에서도 "새로운 시도"라고 극찬했고 레베카의 마지막 공연 날 배우 유준상은 이 같은 내용을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소개해줬다. 무대 의상 디자이너로서 뿌듯하고 자부심을 느꼈던 순간이다.
◇토슈즈를 벗고 천과 바늘을 들다=한씨는 어린 시절부터 옷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무용을 배우던 중학생 시절 그는 무대에 오르며 의상의 힘을 느꼈다. "아라비안나이트를 할 때였는데 의상을 갖추고 춤을 출 때와 의상 없이 춤을 출 때 감정 표현이 달라지더라고요. 의상이 더해져 그 이상의 안무가 나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이후 우연히 일본 패션잡지에 소개된 개성 넘치는 의상들을 본 그는 "컬쳐 쇼크", 즉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토슈즈 대신 천 조각을 손에 쥐었다. 어머니가 "취미로 해보라"며 사준 전자 미싱으로 작은 가방과 옷을 선물하는 게 소녀 한정임의 낙이 됐다. '메이드 바이 한정임' 의상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후 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의 권유로 그는 일본 최고의 패션스쿨인 일본문화 패션칼리지에 들어갔고 1998년 일본 패션기업 아이아컴퍼니에 입사했다.
◇운명을 바꾼 '오페라의 유령'=10년간은 옷에 미쳤다. 야근도 밥 먹듯 했고 집은 샤워만 하고 1~2시간 쪽잠을 자는 곳이 됐다. 입사 3년도 안 돼 수석디자이너가 되면서 연매출 300억~400억원의 큰 브랜드를 관리하는 막중한 업무도 맡게 됐다. 그런데 이상했다.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하는데 언제부턴가 좋아 죽던 옷이 보기 싫어지더군요.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일을 그만두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어요." 입사 10년차인 2007년 사표를 낸 그녀는 생각을 정리할 겸 떠난 영국 여행 중 운명적인 작품을 만나게 된다. 오페라의 유령 공연 중 눈물을 훔치는 노부부를 보고 "감동을 주는 저 무대의 옷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뮤지컬 캣츠 이벤트 의상으로 첫발을 내디딘 그는 대학로 소규모 공연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뮤지컬 시장에 '핫한 디자이너'로 떠올랐다.
◇아직도 첫 공연 땐 눈물 "의상은 내 아기들"=운명처럼 이 업계에 발을 내디딘 후 수백·수천 벌의 의상을 무대에 올렸다. 익숙해졌을 법도 하지만 한씨는 여전히 매 작품의 첫 공연 땐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다 눈물을 터뜨린다.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과 스트레스, '무사히 끝마쳤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오니 요동치는 누선(淚腺)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작품 할 때마다 생명줄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체력 소모도 크고. 같이 고생한 팀원들과 한바탕 펑펑 우는 게 첫 공연의 통과의례가 됐네요.(웃음)" 작품을 '옷'이 아닌 '아기'라고 부르는 그에게 의상을 무대에 올리는 건 잘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것과 같은 심정일 테니 눈물이 나오는 건 부모 된 심정에서 당연한 일이다.
10대 소녀 때 호기심에 손에 쥐었던 천과 바늘은 어느덧 한 디자이너의 운명이자 삶이요, 자식이 됐다. "옷은 정성을 쏟은 만큼 무대에서 빛나요. 몇 달 품은 자식을 세상에 내보내는 건데 부모로서 당연히 정성을 쏟아야죠." 자식 사랑 넘치는 디자이너 한정임. 앞으로 많은 작품을 통해 만나게 될 '한정임의 아이들'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She is … ◇주요 작품 = 2014 모차르트, 태양왕, 프랑켄슈타인, 베르테르,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레베카, 황태자 루돌프, 라카지, 엘리자벳, 햄릿, 몬테크리스토, 모차르트!, 살인마 잭, 천국의 눈물, 락 오브 에이지, 피맛골 연가, 키스 미 케이트, 침묵의 소리, 삼총사, 위대한 Show, 클레오파트라, 실연남녀 |
"무대 뒤 노력 알리는 의상 전시회 열고 싶어" <단순히 옷만 죽 세워놓는 전시 아닌 캐릭터 완성돼가는 과정 보여줄 것 |
사진=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