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년 5월14일, 아메리카 해안에서 강을 따라 올라온 3척의 범선에서 104명의 남자들이 내렸다. 민간자본인 버지니아 회사가 모집한 식민지 개척민들은 144일 동안의 항해 도중 동료 39명을 잃고 살아남았지만 더 큰 시련이 닥쳤다. 무엇보다 위치가 좋지 않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는 스페인의 눈을 피하느라 해안에서 67㎞를 거슬러올라가 자리를 잡았으나 모기가 들끓는 말라리아 늪지대였다. 파종시기를 놓쳐 식량까지 부족했던 상황. 9개월 후에는 38명만 살아남았다. 버지니아 회사는 숱한 희생에도 9년간 1,700명을 실어 날랐다. 금과 은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다. 회사는 금광을 끝내 발견하지 못했으나 담배라는 '대박'을 터뜨렸다. 인디언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와 결혼해 화제를 뿌렸던 존 랄프가 찾아낸 담배 품종 덕에 아메리카 식민지 최초의 경제호황을 누렸다. 1618년 9,000㎏이던 담배 수출이 1622년에는 인디언에게 백인 324명이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2만7,000㎏으로 늘었다. 호황은 백인 인력도 모자라 1619년 흑인까지 불러들여 노예제도도 싹텄다. 식민지 최초의 자치의회인 버지니아 의회도 생기고 수출로 돈을 번 개척민들은 담배 60㎏으로 영국에서 신부를 사들였다. 덕분에 거친 남자들만의 세계였던 식민지는 차츰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바뀌어갔다. 경제적 이익에 집착했던 제임스타운과 달리 신앙심 깊은 청교도를 조상으로 삼고 싶은 생각 때문일까. 미국인들은 정착에 성공한 제임스타운보다 13년 늦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부에 도착한 이른바 '순례시조(Pilgrim Fathers)'를 공식적인 선조로 여긴다.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승리했다면 제임스타운이 부각됐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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