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영국 웨일스의 탄광마을인 애버판의 비극이 영국을 삼켰다. 폭우로 무너진 석탄 폐기물이 초등학교와 주택을 덮쳤다. 이 사고로 어린이를 포함해 144명이 사망했다. 2년 후 영국 글래스고에서 일어난 가구공장 화재로 22명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영국 정부는 1972년 로벤스 위원회가 발간한 로벤스 보고서를 마련해 이 산재 비극을 멈췄다. 200여 페이지의 보고서는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다. 영국의 산재예방체계를 재설계한 체계다. 로벤스 보고서대로 산재예방에 힘쓴 영국은 1978년 3.1명이던 근로자 10만 명당 사고사망 비율이 2023년 0.8명까지 줄였다.
이재명 정부가 산재산축을 전면에 내걸면서 영국의 로벤스 위원회가 한국에도 등장할지 주목받고 있다. 최근 국회입법조사처는 한국판 로벤스 위원회 설치를 제안한 보고서를 냈다. 꾸준히 로벤스 위원회 필요성을 강조해 온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은 이 정부에서 차관급으로 격상된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을 맡았다. 지난해 말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는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8일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이동영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지난달 말 ‘산재 근절대책으로 한국판 로벤스 위원회 설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조사관은 “영국에서 산재가 급감한 이유는 로벤스 보고서를 발간해 산업안전 관련 법령, 조직, 기구, 예산에 대한 점검과 정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로벤스 보고서는 산재 사고의 원인을 무관심으로 결론 냈다.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 이 무관심에서 벗어나 산재예방 관리 주체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보고서의 핵심이다. 보고서는 정부가 지나친 산재 규제를 펴면 노사 자율 예방체계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로벤스 위원회 설립 전 영국의 산재예방에 관한 법률은 9개나 됐다. 너무 많은 법률은 현장의 수용성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이 조사관은 “(보고서는) 법령의 무게를 줄이고 일상적인 상황의 상세한 규정과 지침을 벗어나도록 했다”며 “모든 노동자가 일터안전을 위해 완전한 협력과 참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산재예방분야 권위자인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22년 로벤스 보고서 분석에서 “보고서는 자율 규제란 철학을 산업안전보건법령의 개선 방향으로 제시했다”며 “(한국) 정부도 산재예방 정책에서 자율과 자율 규제를 중요한 정책 방향으로 제시해왔다, 로벤스 보고서가 말하는 자율 규제와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로벤스 보고서는 우리처럼 규제 완화나 처벌 경감을 자율 규제로 정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보고서의 자율 규제는 높은 수준의 (산재예방) 관심과 비용, 노력이 투입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영국은 로벤스 보고서 권고대로 산업안전보건법을 제정하고 안전보건위원회와 안전보건청을 설립했다. 법 제정과 청 설립은 1972년 보고서 발간 이후 3년 안에 완료됐다. 이처럼 신속한 행정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부의 의지와 정치적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사관은 “로벤스 경 위원장은 노조 간부, 국회의원, 노동부 그림자장관(차관)을 역임한 중량급 정치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조사관은 한국판 로벤스 위원회도 정부와 국회가 나서야 가능하다고 봤다. 그는 “(위원회는) 정부 주도나 노사만 참여하면 안전체계 개편 동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여야와 노사 모두의 지지를 받는 정치적 과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류 본부장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서 일환경건강센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로벤스 위원회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류 본부장은 2022년 영국 산업안전보건 전문기관인 IOSH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체계 현실은 1960년대 영국과 흡사하다”며 “산재예방 정책과 법 체계에 대해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한국 사회의 안전보건 시스템의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류 본부장은 산재예방 의무를 사업주에게만 지우면 형식적인 예방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려해왔다. 이 상황은 사업주가 사업장의 위험을 제대로 파악하고 제거할 수 있는 능력도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류 본부장은 이날 서울경제와 통화에서 “보고서는 포괄적인 기본법을 두고 기업을 일일이 규제하는 게 아니라 기업 스스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도록 했다”며 “(노동자에게) 자신의 위험을 스스로 관리하는 주체로서 역할을 부여했다”고 말했다.
이재명 정부는 역대 정부보다 로벤스 위원회의 출범 가능성을 높였다. 지난달 8일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 대표자가 산재 감축 논의를 위해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모였다.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이 자리에서 안전한 일터 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제안된 위원회는 로벤스 위원회와 같은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또 당시 회의에서 노사의 참여 방안, 안전 투자 확대 방안, 안전 문화 확산 방안 등이 논의됐다. 참석자들은 산재 감축 필요성에 공감하고 협력하기로 했다. 김 장관은 “노사 모두 예방의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안전 일터가 실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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