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경제가 저성장 고착화 국면에 들어섰고 민주주의도 위기 징후를 보이고 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국가 개조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런데도 정치권은 진영 논리에 갇혀 경제 혁신을 위한 구조 개혁은 등한시한 채 국민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정병석 아름다운서당 이사장(전 노동부 차관)은 5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성장 정체 등 한국의 위기는 국가 시스템인 제도의 실패, 구체적으로 법 제도와 사회 규범 문화의 위기에서 기인한다”며 “법 제도를 개방적·포용적으로 정비하고 선진적 사회 문화를 확립하는 일이 대한민국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조선의 실패는 제도의 실패 탓이었는데 오늘날에도 법치의 혼란, 규제의 남용 등 위험 요소가 다분하다”며 “이미 규제적·폐쇄적 제도가 많은데도 사회적 경직성과 생산성 저하를 초래하는 법과 제도가 더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지속 성장할 여력이 충분하다”며 “문제는 기득권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혁신을 강력 추진할 지도자가 있느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대한민국 경제는 위기 국면인가.
△성장 정체, 국민과 기업의 활력 저하, 급속한 고령화, 청년 세대의 좌절 등을 감안하면 위기 상황이다. 스웨덴 노벨위원회는 국가의 다양한 제도가 경제성장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정해 1993년 더글러스 노스를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10명에 가까운 제도학파 학자들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수여했다. 제도학파의 관점에 따르면 제도가 자유롭고 포용적이어야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가 발전한다. 국제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효율적인 법과 제도를 제대로 집행하는 강한 정부, 법치와 선진적 사회 문화를 갖춘 나라가 강한 국가라고 규정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무너질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사회적·정치적 갈등의 심화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이는 1948년 제정 헌법에서 규정해 지금까지 한국을 번영하게 한 체제가 해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존 로크와 애덤 스미스가 이념적으로 정립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는 공정한 법 제도가 확립되고 확실히 시행될 때 보장된다. 한국에서는 그 기반인 법치가 위기에 처해 있다.
-저서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라는 질문이 한국 사회에 갖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조선은 경제를 성장시켜야 민생을 개선할 수 있다는 관념 자체가 없는 나라였다. 건국 초기 농사와 양잠은 장려했지만 사대부 지도층의 ‘농본상말(農本商末)’ 정책으로 상공업자는 지극히 천대받았다. 또 조선의 도덕정치는 지나치게 관념적·형식적이고 실제 실행하기도 어려웠다. 지도층에서는 자기 편의 규범 위반에는 눈을 감고 상대방 비리만 지적하는 당파주의가 득세했다. 오늘날에도 그런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신뢰 자본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법령 준수 의식, 상호 신뢰,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 등의 사회 문화가 아직 미흡해 사회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고 양극화되고 있다. 이런 갈등은 주로 정치권 등 지도층에서 유발해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신뢰는 사회가 정한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우선이다. 지도층부터 규범을 지키는 문화가 형성돼야 신뢰 사회가 형성된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포용적 제도의 성공 모델로 한국을 꼽았는데.
△다론 아제모을루와 제임스 A 로빈슨 교수가 지적했듯 조선의 제도는 폐쇄적·착취적 성격을 가졌지만 한국의 제도는 개방적·포용적 성격으로 달라졌다. 지금은 과거 경제성장의 핵심 기반이었던 개방적·포용적 민주주의 체제가 흔들리고 경제 규제가 누적되고 있다. 최근의 성장 정체는 각종 규제로 기업 활동이 제약되고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 부진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성장을 추구한다면서 상법 개정, 노란봉투법, 주52시간제 등 규제를 더 강화하고 있다. 파이 분배는 파이 확대가 전제돼야 가능하다. 재정을 풀어 성장하자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고 후대에 부담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자세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해법은 무엇인가.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엘 모키어 교수의 이론대로 성장이 정체된 한국 사회에는 ‘성장의 문화’와 혁신을 위한 개방형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유용한 지식과 기술의 축적, 이에 기반한 혁신이 지속되려면 비판과 실험을 허용하는 개방적 문화, 지적 경쟁, 사회적 신뢰, 그리고 학문의 자유 등 개방적·경쟁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법 제도뿐 아니라 사회 문화에서도 개방성을 강화해야 혁신이 지속되고 성장을 이어갈 수 있다는 의미다.
-지도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한국인은 두뇌가 세계 최고 수준이며 창의적이고 역동적이다.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면 지속적인 발전을 촉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문제는 지도층이 당장의 표만 의식해 혁신을 추진할 용기가 없다 보니 손쉬운 단편적 방법만 찾는다는 점이다. 타게 에를란데르 전 스웨덴 총리는 23년간 집권하면서 꾸준한 대화와 설득을 통해 스웨덴식 복지 모델을 만들었다. 지도자라면 국가 발전과 국민 행복이 최우선이라는 국가관을 가져야 한다. 용기와 비전을 갖고 기득권을 과감하게 타파할 수 있는 리더십을 살려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 완전한 법치의 실행, 정책 투명성과 경쟁 강화 등 정책 추진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의 확립과 투명성 강화에 초점을 둬야 한다.
-국가와 개인 간, 또는 정부와 시장 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규정한 것처럼 국가 운영에서 각 계층이 분업해 서로 간섭하지 않고 제 역할을 하는 것이 국가의 정의 원칙이다. 스미스는 법과 제도에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개인과 기업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자유를 보장한다면 한 나라가 성장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이 원칙은 우리 헌법에도 규정돼 있는데 지금은 경제활동의 자유를 저해하고 재산권을 침해하는 법령을 남발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절차적 정당성이 왜 중요한가.
△실제 사회에서 개개인의 의식, 가치관, 이해관계 등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원칙에 합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논의 절차가 공정하다면 도출된 결과를 정당하고 공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철학자 존 롤스의 절차적 정당성 원칙의 핵심이다. 절차적 정당성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개인들이 자기 생각과 다른 결과를 얻더라도 합의된 결과를 신뢰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에는 결과만 좋으면 절차는 무시해도 된다는 의식이 많다. 그러니 갈등이 심화되고 반목이 확산된다.
-법치주의는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권력자의 통치 수단인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변질될 위험도 있다.
△누구에게나 법이 엄정하게 적용돼야 하는 것이 법치의 핵심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연원된 이른바 ‘아이소노미(isonomy·법 앞의 평등)’ 원칙이다. 그런데 권력자에게는 솜방망이, 힘없는 국민에게는 철퇴, 이것이 현실이다. 자유주의 사상가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법의 내용보다 공정한 집행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입법 만능주의로 흐르면 ‘법에 의한 지배’가 가능해지고 법치의 위기가 온다.
-지금 여당 인사들은 제도 권력에 대한 선출 권력의 우위를 강조한다.
△삼권은 분립돼 서로 견제하고 3개의 솥발처럼 균형을 이뤄야 한다. 입법부의 권한이 지나치면 솥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게 된다. 제도 권력도 헌법과 법률에 의해 임명된 합법적 권력이다. 선출 권력이 ‘국민의 뜻’을 앞세워 헌법이나 법률이 정한 절차를 무시하거나 과도한 권한을 행사하려 할 때 민주주의에 위기가 발생한다. 하이에크는 의회 권력이 과도하게 확대되면 민주주의에 치명적 위협이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보수 진영이 재건되려면 어떤 가치나 미래 비전을 내세워야 할까.
△법과 제도를 정상화하고 신뢰 등 선진 문화를 확립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청년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다. 보수가 외면받는 것은 이런 정책들을 국민의 피부에 와 닿게 강력히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서당’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인문학을 통해 한국을 이끌어갈 리더들을 키우자는 것이 서당의 기본 취지다. 동서양 고전을 읽고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을 기르려 하고 있다. 세미나에서 교수의 이론 강의는 10분 이내로 제한하고 학생들의 발표와 토론 등 자기주도적인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이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논리와 통찰력·발표력을 길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He is…
1952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 미시간주립대 석사와 중앙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 제17회 행정고시를 수석 합격한 후 노동부에서 30년간 근무하며 주요 보직을 거쳐 노동부 차관을 지냈다. 2006년 한국기술교육대 총장 취임으로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후 한양대 석좌교수·특임교수 등으로 재직하면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현재 아름다운서당 이사장과 삼성물산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대한민국은 왜 무너지는가’ ‘이기는 청춘’ 외에 공저한 ‘최저임금법’ ‘고용보험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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