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영화·연극 등 다양한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영원한 현역’이자 국내 최고령 배우 이순재가 25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내 소망은 무대에서 쓰러지는 것”이라며 끝까지 연기에 대한 열정과 혼을 불태우던 그는 최근 건강 악화 소식을 전했고, 회복해 다시 무대에 오를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끝내 ‘인생이라는 무대’에 작별을 고했다.
이순재는 2019년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인공지능(AI) 등으로 인해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어도 배우만은 살아남을 것”이라며 “인간의 심성은 정말 불가사의하고 무한한데 이걸 어떻게 로봇이 표현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시대를 간파한 거장의 통찰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 젊은이들에게 “모두 태어난 데는 이유가 있다”며 응원하던 ‘시대의 어른’이었다.
‘국민 배우’라는 수식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70년 배우 인생은 한국 대중문화의 격을 높인 역사 그 자체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서울에서 산 고인은 대전고에서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올리고 서울대 철학과에 다니던 1956년 신영균·이낙훈·황은진 등 동기들과 함께 연극반을 재건하는 등 일찍부터 연기에 관심을 보였다. 같은 해 연극 ‘지평선 너머’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으며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대한방송의 드라마 ‘푸른지평선’으로 브라운관에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데뷔 초기 TBC 전속 배우로 100편이 넘는 드라마에 출연했고 1980년대까지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지만 주로 조연으로 활약했다. 전성기도 늦게 찾아왔다. 1991년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버지 역을 맡으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시청률 65%를 넘기고 중국에도 수출되며 한류 드라마의 시초가 된 ‘사랑이 뭐길래’의 인기에 힘입어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이순재는 ‘사극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사모곡’ ‘인목대비’ ‘상노’ ‘풍운’ ‘독립문’ 등 1970~1980년대 사극에 꾸준히 출연했고 ‘허준(1999)’ ‘상도(2001)’ ‘이산(2007)’ 등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시청자들에게 묵직한 감동을 선사했다.
고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간 배우로 많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 70대 들어 출연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과 ‘지붕 뚫고 하이킥(2009)’에서는 근엄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코믹 연기로 큰 사랑을 받으며 ‘야동 순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예능 ‘꽃보다 할배(2013)’에서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의욕 넘치는 모습,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선보여 찬사를 받았다. 빠른 걸음으로 ‘직진 순재’라는 별명도 얻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연극 무대로 돌아와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에서 열연을 펼쳤다. 특히 ‘리어왕’에서는 200분 공연의 방대한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해 극찬을 받았다. 2023년에는 연출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버킷리스트였던 러시아 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후배 배우들과 함께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지난해까지도 그의 연기 열정은 식지 않았다. 10월 건강 문제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기 전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하며 마지막 연기 혼을 불태웠다.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90세에 처음으로 대상을 수상한 그는 “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날도 있네.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또 “(배우 나이 60세가 넘으면) 전부 공로상을 준다”며 “하지만 60 먹어도 잘하면 상 주는 거다. 공로상이 아니다”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연기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보관문화훈장, 2018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고인은 또 연기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꾸준히 관심을 가졌으며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인의 별세 소식이 알려진 뒤 동료 선후배를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애도와 추모가 이어졌다. 해외 순방 중인 이재명 대통령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국민 배우 이순재 선생님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한평생 연기에 전념하며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품격을 높여오신 선생님은 연극과 영화·방송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웃음과 감동, 위로와 용기를 선사해주셨다”고 적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최희정 씨와 아들 이종혁, 딸 이정은 씨가 있다. 발인은 27일 오전 6시 20분, 장지는 이천 에덴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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