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협상을 두고 “국익을 지켰고 마지막으로 명분을 챙기겠다”는 대통령실과 정부의 기류는 미국이 3500억 달러 전액 현금 투자 요구를 완화하면서 협상에 대한 자신감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귀국한지 2~3일만에 다시 미국을 찾는 것도 협상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21일 “미국의 제안을 처음 받았을 당시 스팸 메일로 느낄 만큼 상식 밖의 수준이었지만 설득 과정을 거쳐 쟁점 한두 가지만 남았다”고 말했다. 이는 김 실장이 이달 19일 귀국 직후 취재진에게 “한두 가지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 남아 있다”고 밝힌 것과 같은 맥락으로 최종적으로 현금과 대출·보증 등의 투자 비율 조정과 투자처 선정 및 수익 배분 등 쟁점을 남기고 있다는 점을 전한 것이다.
전날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김 장관도 “외환시장 관련 부분 이견이 가장 컸는데 상당한 양측 공감대가 형성돼 여러 쟁점이 합의를 이뤘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3500억 달러 전액 현금 투자를 한국 외환시장이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을 미국이 인식하면서 의견 차가 빠르게 좁혀지는 양상으로 보인다.
정부 등에 따르면 이 같은 협상단의 방미 실무 협의 결과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직접 대면 보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통령은 김 장관과 함께 협상을 주도해온 김 실장,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등 핵심 참모들과 진행 경과, 미국 측 기류, 향후 협상 전략 등을 최종 점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실장과 김 장관이 기존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미국으로 향하기로 한 것은 남은 쟁점에 대한 이 대통령 차원의 결단이 마무리됐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금까지의 협상 결과가 대통령실에서 그동안 강조해온 대로 국익을 충분히 지켰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이에 김 실장과 김 장관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톱다운’ 방식으로 합의 문구를 담은 메시지를 내놓을 수 있도록 미국 측과 막판 조율 작업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대통령도 20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자리에서 “유럽연합(EU)과 매우 공정한 무역협정을 체결했고 일본·한국과도 그렇다”고 언급했다. 최종 협정 서명 전에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무역 협상에 대해 협정이 완료된 것처럼 표현한 만큼 협상이 최종 단계에 이르렀음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성명을 통해 “최근 중국이 전 세계 민간기업을 상대로 보복 조치를 취한 것은 경제적 강압”이라며 “미국 조선업 기반 재건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최근 발표된 한화오션 미국 자회사 5곳에 대한 중국의 제재를 겨냥한 셈이다. 미국이 동맹국들과 손잡고 중국을 견제하는 단일 전선을 구축하려는 상황을 우리 정부도 최대한 활용할 것이 확실시된다. 관세 협상에서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명분’을 챙기며 협상의 마지막 퍼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에서는 이번 관세 협상 과정에서 위기를 극복하면 동맹으로서 상호 호혜적 관계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당장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 등을 지렛대로 삼아 미국 내에서도 한국이 조선업 재건에 필수적인 동맹국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키는 것이 목표다.
동시에 안보 측면에서도 한국이 대중 견제의 핵심 파트너라는 점을 각인시키며 협상 명분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이 대통령이 전날 방위산업 발전 토론회에서 자주국방을 강조하고 “국방비를 대폭 늘려 첨단 국방 기술을 개발하겠다”강조한 것 역시 동맹 현대화의 일환으로 미국에 충분한 메시지를 건넸다는 분석이다. 단지 3500억 달러 투자 외에도 한국은 미국과 반도체 공동 연구, 방산 수출 협력, 청정에너지 공동 투자 등 다각적인 경제와 안보 협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동맹 관계라는 분명한 입지를 쌓겠다는 전략의 일환인 셈이다. 이 같은 전략은 관세 협상을 매듭지은 뒤에도 주한미군의 미래형 전략화 등 외교안보를 포괄하는 추가 한미 협력 방안 논의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해석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최근 미국 측 협상 창구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으로 일원화된 것 또한 호재”라며 “러트닉 장관을 비롯해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그리어 대표로 협상 창구가 분산됐던 비효율이 해소되면서 협상 속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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