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막을 앞둔 경주가 천년 고도의 역사성과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무대로 변모했다. 신라 유적지 한복판의 솔거미술관에서는 신라와 불교 미학에 기반한 현대미술이, 보문단지 내 우양미술관에서는 백남준의 미래적 시선이 세계 정상들을 맞이한다. 한국 미술이 문화 외교의 창구로도 기능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경주솔거미술관은 22일부터 내년 4월 26일까지 특별전 ‘신라한향 : 신라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향기’를 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 주최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APEC의 핵심 의제인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신라 문화와 불교 세계관으로 재해석한다.
한국 수묵화 거장 박대성 화백을 중심으로 불화의 교리를 회화로 표현하는 불화장(佛畵匠) 송천 스님, 전통 회화 수복 전문가이기도 한 김민 작가, 폐유리를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업사이클링 유리 공예가 박선민 등 4인전으로 기획됐다. 심상, 융합, 진리, 원융(원만하여 융합되다)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구성된 전시에는 보기 드문 대작들이 즐비하다. 백두산 천지연과 한라산 백록담, 금강산의 무수한 봉우리가 어우러지는 배경으로 고구려 벽화 속 삼족오, 도자기, 기와, 불상 등 한국 문화의 정수가 자리한 박대성 화백의 가로 12m 대작 ‘코리아 판타지’가 눈길을 끈다. 지난해 부산비엔날레 출품작이자 불교와 기독교 미술의 융합을 통해 종교를 초월한 진리를 탐구한 송현 스님의 작품 ‘관음과 마리아-진리는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의 신작 버전도 자리했다. 4m 높이의 작품은 푸른 옷의 성모 마리아와 붉은 옷의 관세음보살이 마주 보는 구도로 종교를 넘나드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밖에 석굴암 본존불과 석가탑, 다보탑을 금·은박 재료의 전통 회화로 풀어낸 김민 작가의 작품과 자원 순환·환경 문제를 예술적으로 재해석한 박선민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1년 간의 전면 리모델링 끝에 7월 다시 문을 연 우양미술관은 재개관 기념 전시로 백남준 소장품 10여 점을 오랜 수복을 거쳐 공개하는 특별전 ‘휴머니티 인 더 서키츠’를 열고 있다. 특히 비디오 설치 연작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 중 ‘경제학’과 ‘영혼성’이 수리·복원을 거쳐 1992년 이후 30여년 만에 대중을 만난다. 1989~1991년 총 13점이 제작된 연작은 독일 문호 괴테의 고전을 바탕으로 자본, 윤리, 시간, 존재라는 주제를 동서양 철학과 기술적 상상력으로 교차시킨다. ‘경제학’이 자본과 인간 가치의 충돌을 형상화한다면 ‘영혼성’은 기술의 유한성 속에서 기억과 정신이 지속될 가능성을 탐색한다. 2년 반의 복원 작업 끝에 다시 대중에 공개된 ‘전자초고속도로’ 시리즈와 1991년 우양미술관 설립을 기념해 제작된 ‘고대기마인상’도 만날 수 있다. 자동차와 한국 전통 가마의 결합이 독특한 ‘전자초고속도로 - 1929 포드’는 기술 네트워크가 인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할 것이라는 예견을, ‘고대기마인상’은 경주에서 발굴된 고대 기마 인물형 토기를 모티프 삼은 작품으로 빠른 정보 전달력이 새로운 지배 질서를 만든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백남준의 미래적 사유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는 11월 30일까지 열린다.
문체부 관계자는 “이번 특별전이 한국 미술의 전통과 혁신을 조명하는 동시에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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