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중국·러시아 3국 정상이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을 기점으로 66년 만에 나란히 앉아 우호 관계와 세(勢)를 과시하자 세계 질서를 자기 식대로 재편하려고 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차피 미국을 등지지 못할 것으로 여기는 동맹국은 홀대하면서 러시아와 북한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중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던 전략이 아직까지는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했음을 만천하에 알린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7개월 남짓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기간 동안 중국은 고립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인도 등 관세 폭탄에 미국과 척을 지게 된 제3세계의 거대 세력과 더 큰 반미 연대를 꾸리게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국제 무대에 복귀한 뒤,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이 미국을 농락하듯 자기 길만 걷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그 사이 핵 보유국으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친분 과시를 발판 삼아 할아버지인 김일성, 아버지인 김정일 정권 때보다 자신의 국제적 입지를 더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대통령, 김정은은 사실상 종신 지도자이기에 임기제 정치인인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 외교에 비교적 여유 있게 대응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와 미중 무역·기술 경쟁, 각국 관세 전쟁, 북핵 문제 등이 금융 시장에 시한폭탄처럼 산재한 상태에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대외 불확실성만 한층 더 높아진 셈이다. 외교가와 월가 전문가들은 한미일 등 미국의 전통 동맹 강화 필요성이 높아졌다며 반미 진영의 위협과 한반도의 위기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됐다고 우려했다.
북중러 ‘反美 망루’에 나란히 집결…시진핑 “평화·전쟁 갈림길”
북한·중국·러시아 3국 정상은 지난 3일(현지 시간) 중국 베이징 톈안먼광장에서 열린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열병식을 맞아 망루에 함께 섰다. 특히 이날엔 시 주석의 양옆에 김정은과 푸틴 대통령이 나란히 서는 ‘역사적 광경’이 연출됐다.
시 주석은 이날 연설에서 “평화냐 전쟁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주의 행보를 직격하는 발언을 내놓았다. 시 주석은 “역사는 인류의 운명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경고한다”며 “인류는 다시 평화와 전쟁, 대화와 대결, 윈윈 협력과 제로섬게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고립주의 외교를 펼치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차별 관세를 퍼붓는 미국을 비판하고 다자주의를 지향하는 중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우회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냉전 종식 이후 북중러 3국 최고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옛 소련 시절까지 포함해도 1959년 중국 국경절(건국기념일) 열병식 당시 북한 김일성,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함께 망루에 선 후 66년 만이다. 김정은이 양자 외교가 아닌 다자 외교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처음이었다.
시 주석은 이날 행사로 일각에서 제기된 퇴진론을 완전히 불식시키고 자신의 건재를 만방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푸틴 대통령도 지난달 15일 미국 알래스카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에 이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국제사회 고립을 벗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세계에 전파했다.
김정은 또한 독자적인 외교 성과를 얻었다. 김정은은 행사 내내 시 주석의 각별한 예우를 받았다. 게다가 김정은은 딸 김주애까지 대동하고 중국을 찾아 후계 구도까지 공고히 하면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외신들은 김정은이 이번 방중에서 김일성을 뛰어넘는 정치적 승리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김정은이 중국, 러시아를 통해 긴밀한 경제·안보 보장 관계를 구축하게 되면서 이재명 정부와 직접적으로 남북 대화를 할 필요성도 대폭 줄게 됐다. 제재 해제와 핵 보유국 인정, 북미 수교 등을 최대 외교 목표로 삼는 북한은 문재인 정부 초기처럼 한국을 미국과의 소통 통로 용도로만 활용하려 하는 편이다.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한국을 욕보이는 담화문을 낼 때조차 굳이 미국 낮 시간에 항상 맞춰 발표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말로만 “다 친하다”던 트럼프, 3국 모이자 돌연 분통…"반미 모의"
북중러 3국 정상이 예상 외로 강하게 결속하는 모습을 보이자 애써 담담한 척 하던 트럼프 대통령도 결국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일 트루스소셜에 “시 주석이 미국에 대항할 모의를 하면서 푸틴 대통령과 김정은에게 나의 가장 따뜻한 안부 인사를 전해달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중국이 매우 적대적인 외국 침략자를 상대로 자유를 확보하는 데 미국이 제공한 막대한 양의 지원과 피를 시 주석이 언급해야 한다”며 “중국이 승리와 영광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미국인이 죽었고 나는 그들이 정당하게 예우받고 기억되기 바란다”고 주장했다.
해당 게시물은 북중러 정상이 나란히 서서 열병식을 지켜보는 시각 직후에 올라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엔 연합국의 적국이었으나 이제는 미국의 동맹국이 된 일본은 ‘매우 적대적인 외국 침략자’로 에둘러 표현하고, 1941~1942년 중화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이 비밀리에 보낸 조종사들의 역할은 강조한 내용이었다. 중국이 이번 전승절을 통해 2차 세계대전 승전과 관련한 미국의 역할을 깎아내리고 중국의 성과를 부각하는 쪽으로 역사를 왜곡하려 한다는 관측이 나오자 견제구를 던진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열병식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북중러의 연대 움직임에 대해 “우려하지 않는다”며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스콧 제닝스 라디오쇼’ 인터뷰에서도 “미국을 향해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3국 밀착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넘겼다.
그러다가 막상 시 주석, 푸틴 대통령, 김정은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자 ‘반미 모의’를 운운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을 두고도 라디오쇼에서 “매우 실망했다”고 말했다가 백악관에 가서는 ‘푸틴 대통령과 통화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대단한 비밀 전략이라도 있는 척 말을 바꿨다. 트럼프 대통령은 구체적인 설명은 없이 “매우 흥미로운 것들을 파악했다”며 “앞으로 며칠 후에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대해서도 “중국은 미국이 필요하다”며 “나는 시 주석과도 매우 좋은 관계를 갖고 있지만 중국은 우리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장담했다.
“시진핑이 미국 얘기 안해 매우 놀라…폴란드 외 미군 철수 검토”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날인 3일에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다가 취재진의 중국 전승절 열병식 관련 질문을 받고 “시 주석은 내 친구인데 미국이 그의 연설에서 반드시 언급됐어야 했다”고 역설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이 그렇게 하지 않아 “매우 놀랐다”며 “우리는 중국을 매우, 매우 많이 도왔다”는 사실을 재차 부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전승절 열병식을 두고는 “아름다운 행사였다”며 “매우,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트럼프 대통령 본인도 지난 6월 14일 미국 육군 창설 250주년이자 자신을 생일을 기념해 수도 워싱턴DC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개최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그들이 왜 그것을 하는지 이유를 알고 있다”며 “그들은 내가 보기를 바랐을 것이고 나는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나는 그들 모두와 관계가 매우 좋다”며 “얼마나 좋은지는 앞으로 1∼2주 사이에 보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공습을 이어가는 푸틴 대통령을 향해서는 “전할 메시지는 없다”면서도 “그는 내가 어떤 입장인지 알고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의 결정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에 만족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며 “만약 우리가 만족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여러분은 보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며칠 안에 푸틴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눌 것이고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면서 폴란드를 향해 “우리는 폴란드에서 군인을 철수한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결코 없다”면서도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철수를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폴란드에는 현재 1만여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미군 철수 발언으로 2만 8500명 안팎의 미군이 주둔하는 한국도 긴장을 해야 할 상황이 됐다.
푸틴 "평화협정 없으면 무력 해결…젤렌스키, 준비되면 모스크바 오라"
이런 상황에서 열병식에 참석 푸틴 대통령은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겠다는 취지의 협박 발언을 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양자 정상회담과 관련해서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회담할 준비가 됐다면 모스크바로 오라”고 압박했다.
러시아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3일 중국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평화 협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모든 일을 군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의 양자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가능하다”면서도 “젤렌스키 대통령이 준비하고 모스크바로 오면 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을 참관하는 동안에도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대적인 공습을 펼쳤다. 우크라이나 공군에 따르면 3일 러시아는 드론 502대, 미사일 24발을 쏴 우크라이나 14개 지점을 타격했다. 이 공습으로 노동자 4명을 포함한 총 5명이 다쳤고 주택 28채가 파손됐다.
푸틴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올해 3차례 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직접 협상 대표의 급을 높일 수 있지만 현 협상단장인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크렘린궁 보좌관의 역할에 만족한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을 ‘우크라이나의 행정부 수반 대행’이라고 격하해 표현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단순히 행정부 수반 대행과 조심스럽게 회의를 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회담이 잘 준비되고 긍정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나는 이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또 “우크라이나 영토 문제는 국민투표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며 “국민투표를 하려면 계엄령이 해제돼야 하고 선거도 즉시 치러야 한다”고 덧붙였다.
푸틴 대통령은 최근 미국과 유럽이 논의하는 우크라이나 안전보장 문제와 관련해서도 러시아의 이익을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모든 국가는 스스로 안전보장을 선택할 수 있지만 러시아 등 다른 나라의 안보를 희생한 안전보장은 불가하다”며 “지난달 15일 알래스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영토를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안을 제기한 적이 없다. 우리는 절대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시하거나 논의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군은 전체 전선에서 전진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군은 대규모 공세를 수행할 능력이 없어 진지를 유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안한 모스크바 방문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고 관련 준비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안드리 시비하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서 “푸틴 대통령은 고의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하면서 모두를 농락하고 있다”며 “오스트리아, 바티칸, 스위스, 걸프 국가 3곳 등 최소 7개국이 회담을 개최할 준비가 됐으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런 회담에는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푸틴 “美대통령 유머 있어”…트럼프 “2~3단계 제재도 있다”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중러 3국 정상의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 참석을 가리켜 ‘반미 모의’로 표현한 데 대해서도 “미국 대통령이 유머가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고 모두가 이를 안다”고 무시했다. 푸틴 대통령은 “나는 트럼프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를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른다”며 “지난달 31일부터 나흘간 중국에서 여러 국가 정상과 대화하는 동안 미국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듣지 못했고 모두가 알래스카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을 지지했다”고 전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최근 자신을 ‘전쟁범죄자’로 부른 데 대해서는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위한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라고 비판했다.
궁지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취임 뒤 푸틴 대통령에게 아무 조치도 안 했다(No Action)’는 질문을 받고 “어떻게 그렇게 아느냐”고 발끈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에 2차 제재를 가했는데도 그렇게 말하느냐. 인도는 중국 다음으로 (러시아 원유의) 가장 큰 구매자이고 러시아에 수천억 달러의 피해를 줬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는 2단계나 3단계(제재 조치)는 아직 하지도 않았다”며 질문을 한 기자를 향해 “새 직업을 구해야 할 것 같다”고 면박을 줬다. 미국은 앞서 인도가 러시아산 원유를 구입하고 이를 재판매에 활용한다는 이유로 지난달 27일부터 인도에 50%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제재 발언은 미러정상회담 직후인 지난 17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의 설명과는 배치되는 내용이기도 했다. 루비오 장관은 당시 폭스뉴스에서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제재가 휴전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러시아는 이미 매우 혹독한 제재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재가 고통을 주려면 몇 개월, 몇 년이 걸린다”며 “새로운 제재를 부과하는 순간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에 앉힐 우리의 능력이 심각하게 줄어든다”고 토로했다.
외교가와 월가에서는 이번 중국 전승절 열병식을 계기로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던 중국의 국제적 고립,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종전, 북한의 비핵화 등이 모두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관련해 이 대통령은 앞서 지난달 25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을 만나 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것을 추진할 것이고 매우 좋은 일”이라면서도 이 대통령을 향해 “내가 함께 일해 본 한국의 다른 지도자들보다 그것을 하려는 성향이 훨씬 더 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스톡커(Stocker)’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투자에 도움이 될 만한 미국의 증시·기업·경제·행정·외교·정치 관련 현장 이야기와 현안 분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구독하시면 유익한 미국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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