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이나 행려병자와 같이 삶이 어려운 사람들을 진료하면서 삶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27일 서울역 인근에 위치한 요셉의원에서 만난 고영초 원장(건국대 명예교수, 신경외과 전문의)은 흰색 가운이 아닌 푸른색 수술복을 입고 인터뷰에 응했다. 고희를 넘겨 머리카락에 흰머리가 더 많지만 얼굴은 맑았고 에너지가 넘쳤다.
고 원장은 “서울대 의과대학 재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50년을 의료봉사 활동을 했다”며 “1973년 의대 본과 1학년 때 경기 양평군으로 첫 의료봉사를 갔는데 그 경험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회고했다.
당시 양평은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었고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온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고 원장은 환자 접수와 안내를 하면서 ‘의료를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1987년 고(故) 선우경식 원장이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개원한 요셉의원은 노숙인과 행려병자, 쪽방촌 주민 등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40년 가까이 무료 진료 등 의료봉사를 펼쳤다. 신림동이 재개발되면서 1997년 영등포 쪽방촌으로 이전한 요셉의원은 올 들어 영등포 쪽방촌이 재개발에 들어가자 다시 둥지를 서울역 인근으로 옮겨 이달 초부터 진료를 재개했다. 요셉의원 초창기부터 의료봉사에 참여했던 고 원장은 2023년 대학교수직에서 물러난 후 3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요셉의원이 개원할 당시는 의료보험 제도가 정착되기 전이어서 병원비가 비싼 편이었다. 요셉의원은 진료비를 대폭 낮췄지만 그마저도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요셉의원은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료비를 전혀 받지 않게 됐다. 고 원장은 “무료 진료를 하니 주변에서는 곧 문을 닫을 것으로 예상하고 걱정을 많이 했지만 병원은 지금까지 잘 운영되고 있고, 올해 5월 기준 77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현재 요셉병원은 130여 명의 의료진 봉사자와 740여 명의 자원봉사자, 그리고 5500여 명의 후원자들이 함께 운영해가고 있다. 하루 평균 70~100명의 환자가 무료로 진료를 받는다. 돈이 없어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 병원이 마지막 보루다.
요셉의원이 30년 가까이 위치했던 영등포 쪽방촌 인근도 저소득층은 물론 노숙인과 행려병자들이 많은 곳이었지만 옮겨온 서울역 인근 또한 여건은 비슷하다. 고 원장은 “서울역 주변에도 쪽방 주민과 노숙인들이 많아 달라진 것을 크게 못 느끼겠다”며 “새 병원은 공간 규모가 조금 줄었지만 접근성이 좋아 환자와 봉사자 모두 만족도가 높다”고 설명했다. 이어 “병원이 속한 용산구와 협력해 역할도 나눌 수 있다”며 “용산구에는 노숙인지원센터와 무료 급식소가 있어 우리는 진료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요셉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단순히 병을 고치러 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 이곳은 상담소와 쉼터 역할도 하고 있다. 그는 “요셉의원을 찾는 환자들은 대부분 사연이 많은 분들”이라며 “환자들은 치료보다 먼저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를 하소연하고 싶어 해 우리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공감한다”고 전했다. 고 원장은 이어 “의사의 역할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먼저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특히 쪽방 주민이나 노숙인들은 상처가 많아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덜어주는 게 곧 치료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고 원장은 원래 신부의 길을 고민했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성경 속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라’는 구절을 삶의 나침반으로 삼는다. 그는 “예수님도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소외된 자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그들을 위해 여러 활동을 했다”면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환자들과 최대한 공감하려고 노력하면서 진료에 임한다”고 말했다. 고 원장은 2014년 ‘장기려의도상’을 받았고 2021년에는 ‘LG의인상’을, 지난해에는 ‘아산상 의료봉사상’을 수상했다. 상금은 봉사해온 여러 병원에 나눠 기부했다.
그는 둥지를 옮긴 병원에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음악을 통한 치유 활동을 넓히는 것이다. 그는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무대에도 오른 성악가다. 고 원장은 “영등포 시절에도 가끔 노숙인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면서 음악 치유 활동을 했었다”며 “새로 터를 잡은 병원에서도 음악을 통해 노숙인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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