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중국 외교부가 공개한 보도자료에는 인상적인 표현이 담겨 있다. 이날 조현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통화에서 왕 부장의 발언으로, 우리나라 외교부의 보도자료에는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왕 부장은 “양국 관계는 공동의 이익과 양국민의 이익을 기반으로 하되 어떠한 제3자를 겨냥하지도, 제3자로부터 제약받지도 않아야 한다”고 했다. 왕 부장은 이어 “중한 경제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공급망이 고도로 연계돼 있다”면서 “자유무역의 수혜국으로서 양국은 디커플링과 공급망 단절을 막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언뜻 원론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현재 한국과 미국·중국이 각각 서 있는 위치를 감안하면 전혀 다르게 읽히는 발언이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강력한 경고”라고 해석했다. 경제적으로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미국 편만 들었다간 큰일 난다는 경고라는 것이다.
사흘 후에는 주한 중국대사관도 나섰다. 한미 동맹 현대화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묻는 연합뉴스의 질의에 주한 중국대사관은 “한미 동맹 발전이 제3자의 이익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미국은 옛날의 미국이 아니다. 중국이든 동맹국이든 가리지 않고 관세 폭격을 가하고 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머니머신(현금 지급기)’이라고 부르는 실정이다. 우크라이나·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들이 백악관에서 받은 모욕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동맹국들은 ‘동맹 현대화’라는 명목으로 지역 분쟁에 끌려들어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강을 옆에 둔 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미국과 중국은 치열한 전략 경쟁을 벌이고 있다. 어느 한 쪽과도 사이가 틀어졌다가간 후과가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도 옛날의 한국은 아니다. 20년 전에는 해외에서 ‘한국인’이라고 밝히면 기껏해야 ‘북한이냐 남한이냐’가 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이든 화장품이든 콘텐츠든, 한국에 대한 대화가 줄줄 이어진다. 어려웠던 시절에 청년기를 보낸 기성대들은 이런 ‘한국의 위상’이 모래 위의 집 같은 것은 아닐지 불안해하고는 한다. 자꾸만 해외의 평가를 의식하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정작 지금의 젊은 세대는 과거의 한국이 신기하다.
이처럼 모두가 달라진 환경에서 우리나라의 외교 역시 과거와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강한 중견국으로서 정체성을 만들어나갈 때다. 국민들도 이제는 ‘친미 아니면 친중’이라는 낡은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치열한 외교전에서 우리의 길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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